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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산시 노성면 노성산 기슭에 자리한 윤증고택(명재고택)의 교동전독(항아리) 간장은 해마다 새로 담근 장에 묵은 장을 부어 되매기 장을 만들기 때문에 300년간 한결같은 맛을 유지해오고 있다 |
따뜻한 아랫목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그 뜨끈뜨끈한 한옥 방구들의 질감은 아파트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푸근함이다.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은 성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사지일 때는 평지로 만들기 보다는 경사를 그대로 활용한다. 지형을 파내거나 덧붙이지 않는다. 그냥 물 흘러가듯 내버려둔다. 자연미를 훼손하지 않고, 환경을 거스르지 않으니 이보다 아늑한 '집'은 없다.
방을 배치할 때도 대청을 사이에 두어 독립성을 가질 만큼 지혜롭다. 건물의 색채 또한 자연색을 그대로 살려 과장하지 않는다. 열린 창문 넘어 보이는 앞마당과 뒤뜰의 정원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번 여행지는 그런 한옥의 기풍을 갖고 있는 '청백리의 산실' 윤증고택(명재고택)이다. 온기를 품기 힘든 콘크리트 세상을 잠시 잊고 등짝을 뜨겁게 달구는 온아한 한옥으로 떠나본다.
논산은 금강과 논산천이 빚은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 고을이다. 또한 계백장군이 황산벌서 목숨 바친 충절의 고을이기도 하다. 논산시 노성면 노성산 기슭에 자리한 명재고택은 이런 올곧은 선비정신의 모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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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도 담도 없는’ 명재고택은 마당에서 집안으로 직접 들어가니 친서민적이다. 안채와 사랑채, 고택탐방 코너로 마련된 노서서재의 모습.나재필 기자 |
조선 숙종 때 학자 윤증(호 명재)은 임금이 10번 넘게 벼슬하라고 불러도 끝내 벼슬을 거부한 ‘백의정승’이다. 마지막에는 임금이 명재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우의정을 준다고 했지만 이것마저 거부했다. '탕평인사'라는 명분에 맞지 않는 벼슬은 절대로 받지 않았던 것이다. '대제학 세 명이 처사 한 명만 못하다'는 경우는 바로 일생동안 처사로 살았던 명재를 가리킨다.
그는 ‘소론의 당수’로서 청빈한 삶을 살았다. 평생 한가지 반찬과 보리밥에 나물국만을 고집했으며, 봄·여름 해가 긴 날에도 두 번만 식사했다. 유언으로 제사상의 크기도 미리 정해 놓았을 정도다. 음식을 간소하게 차리라는 당부였던 것이다.
‘울도 담도 없는' 명재고택은 생긴 지 300년이 넘었다. 노성산을 병풍삼아 앉아있는 사랑채가 먼저 길손을 맞는다. 안채 앞에 사랑채가 놓인 격이다. 솟을대문을 밀어젖히고 ‘이리 오너라. 아무도 없느냐’며 거드름 부릴 필요가 없다. 이는 너른 집 뜨락을 향민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 배려였을 것이다. 게다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겸손하기까지 하다. 고택을 전체적으로 보면 으리으리하지 않다. 부자옹이나 벼슬살이한 사람들의 뻑적지근한 저택에도 미치지 못한다.
사랑채는 집안의 어른이 기거하면서 책을 보고 손님을 맞는 곳이다. 사랑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가 기거하는 큰 사랑방과 아들의 작은 사랑방이 서로 마주본다. 탁 트인 누마루에 앉으면 마음의 빗장도 열리고 만다.
윤증고택을 이루는 두 개의 중심영역은 안채와 사랑채다. 사랑채는 바깥세상에 공개되고 당당한 형태를 갖지만, 안채는 속속곳을 감춰놓은 듯 폐쇄돼 무표정하다. 안채로 통하는 평대문에는 내·외벽을 설치해 방문객의 시선이 안채의 중심과 직접 맞닥뜨리지 않도록 했다.
명재고택은 여러 선들이 모여 하나가 된 건축이다. 한옥의 처마 선은 물찬 제비가 땅으로 내려오다가 하늘을 향해 몸을 돌리는 형상이다. 지상과 천상이 만나는 꼭짓점에 있는 것이다. 지붕 선은 선녀의 허리 마냥 휘어있지만 실은 선비의 기개를 초연히 드러낸 것이다.
암기와와 숫기와를 번갈아 얹어 놓아 비가 오면 기와골을 따라 자연스럽게 아래로 흐르도록 했다. 기와 사이의 틈은 뜨거운 햇빛으로 데워진 지붕의 열기를 식혀준다. 그냥 한옥이 아니라 과학이 접목된 ‘인텔리전트 하우스’다.
사랑채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뒷방으로 들어가는 샛장지(방과 방 사이의 칸막이한 장지)다. 창살의 격자가 가로세로 촘촘한 창인 ‘만살창’으로 만든 네 짝의 미닫이인데 가운데 두짝을 좌우로 밀면 여닫을 수 있다. 끝의 문짝이 돌쩌귀에 달렸기 때문에 개폐가 가능하다. 고택의 방에는 햇볕도 직선으로 오지 않는다. 지붕의 처마를 거쳐 걸러진 빛이 창호지를 통해 은은하게 들어온다. 집안이 너무 어두워지지 않도록 마당에 잔디를 심지 않고 마사토를 깔아 볕을 방안으로 끌어들였다. 창호지를 통해 바람소리, 빗소리, 새소리를 들을 수 있고 청죽(靑竹)과 청송(靑松)의 단아함을 느낄 수 있다.
안마당은 널찍하고 반듯하며 정갈하다. '마당'이라는 가장 비어있는 공간을 건물들의 중심으로 삼았는데 외부공간이라기 보다 ‘방 밖에 있는 방’이다. 이곳에 ㄷ자형의 안채가 자리한다. 넓은 대청은 양명한 햇볕이 가득하다. 안방에서 밖을 내다보면 풍신한 들녘과 촌가, 송림 사이로 부는 포근한 바람이 청신하다. 대청마루 바라지창을 밀어 제치면 배롱나무가 신령스럽게 뻗어있는 연못과 우물이 있고 장독대가 보인다. 정결한 장소에 깨끗하게 정돈된 수백 개의 독이 가지런하다. 그 위에는 산으로 가는 작은 언덕이 있고 400년 된 느티나무 3그루가 세월의 더께를 날리며 침잠하고 있다.
이 장독은 묵은 장을 햇장에 첨장해 항아리째 전하기 때문에 전독간장·된장이라 불린다. 이 교동 전독(항아리) 간장은 해마다 새로 담근 장에 묵은 장을 부어 되매기 장을 만들기 때문에 300년간 한결같은 맛을 유지해 오고 있다. 간장을 달이는 날에는 온 동네에 장 냄새가 진동을 해 몸져 앓아 누워있는 환자도 ‘교동댁의 간장을 좀 먹었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고 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한 숟가락이면 아픈 배가 나았다는 약간장으로도 유명하다.
논산 노성리는 '노성참게'의 산지다. 노성참게는 임금님 수라상에 올라갔던 참게였다. 금강 하구의 뻘밭에서 산란을 하기 위하여 참게가 노성리까지 올라오다 보면 운동이 많이 돼 털이 빠지기 마련이다. 털이 빠지면 먹기가 좋다. 뿐만 아니라 운동을 많이 하므로 육질이 쫄깃쫄깃하다. 윤씨 집안에서는 이 참게를 잡아서 우선 참기름 통에 담가 놓았다고 한다. 그러면 참기름이 게에 스며들어서 맛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윤증선생 고택의 바로 왼쪽엔 노성향교가 있고, 오른쪽엔 궐리사가 있다. 궐리사(闕里祠)란 공자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을 일컫는다. 노성궐리사는 현 위치에서 서쪽으로 있는 노성산 아래에 있던 것을 1805년에 이 자리로 이전한 것이라 한다. 당초 궐리사는 강릉·제천·오산에도 있었지만 현재는 노성면과 오산에만 남아 있으며, 각 유림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에 모여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고택 전면에는 선생의 가슴에 한으로 남은 모친의 열녀(烈女) 정려각이 있다. 선생의 모친(공주 이씨)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함락되자 오랑캐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여 자결했다.
고택 탐방 코너로 명재고택에 마련된 작은 도서관 '노서서재(魯西書齋)'도 볼 수 있다. 노서는 윤증 선생의 부친 윤선거의 호다. 행랑채를 복원해 초가지붕과 황토벽으로 꾸며 전통의 멋을 더한다. 고택 방문 길에 교동 전독 간장과 된장으로 요리한 정갈한 식사를 맛보거나, 장을 구매할 수도 있다. 고택 숙박은 최소 열흘 전에 예약해야 한다. 문의는 홈페이지(http://www.yunjeung.com)나 전화(041-735-1215)를 하면 된다.
◆논산 명재고택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정안톨게이트~23번 국도에서 논산방면으로 약 40㎞~노성면~노성중학교 앞 우회전~고택(내비게이션: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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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나재필 기자
najepil@cctoday.co.kr
논산=김흥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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