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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호 선수 아버지 박제근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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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시간에 맞춰 집에 들르니 박제근(69) 씨는 출타 중이었다. 마을회관에 계신다는 전갈이 왔다. 곧장 차를 몰아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주민 여러 명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 선수의 아버지 박제근 씨를 그렇게 어렵사리 만났다. 공주시 무릉동 농촌마을 들녘은 눈이 쌓여 흡사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했다.
"무슨 얘기를 듣고 싶어 여기까지 왔어? 나는 할 말이 없으니까 찬호한테 가봐. 기왕 왔으니 우리 마을 자랑이나 해줘. 여기가 참 살기 좋거든." 농촌 마을 어디에서도 마주칠 수 있는 촌로(村老)의 모습 그대로였다. 마을회관에 트럭을 타고 왔다는 말에서 소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인터뷰 할 장소가 마땅찮아 고민하는데 동네 주민이 "우리 집에서 하면 될 것 아녀”하며 집으로 안내했다. 마을 주민들이 모두 한 식구 같았다. 박 씨는 주민들과 자주 어울려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눈다고 했다.
수확철이 끝나 요즘은 한가한 모습이었다. "소일거리 겸 건강 겸 밤·은행나무를 가꿔 지인들과 나눠 먹지요." 이야기 도중 전화벨이 울렸다. "찬호 전화인디." 집에 자주 들리느냐는 말에 "찬호가 워낙 바빠 자주는 못 들려. 전화통화는 매일 하는디, 집사람은 아침마다 통화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지."라고 말했다.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버펄로스의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이 박찬호가 올해 두자릿수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놨다는 소식을 전하자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야구에 관해서는 밤 세워 이야기를 해도 모자랄 정도로 술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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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한기라 좀 한가하시지요.
"장사는 찬호가 미국에 가면서 그만 둬서, 예전부터 하던 밤나무, 은행나무, 과일농장을 건강삼아 운영하고 있지요. 마을회관에 모여 사람 만나서 얘기도 하고, 소일거리 찾아 하고,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지역에서 유명세 많이 타셨을 텐데 불편한 점은 없으셨나요.
"뭐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지금도 농사일을 계속 하고 있고, 마을 사람들이랑 무슨 일이든 같이 하기 위해서 소박하게 살고 있죠. 지역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그래서 원래 살던 대로 살고 있어요."
-박찬호 선수를 보면 운동신경을 타고 난 것 같은데 원래 아버님께서도 운동에 소질이 있으셨는지요.
"대회에 나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유도를 조금 했었죠. 그게 특기라기엔 쑥스럽고, 취미로 즐기는 정도였어요. 사실 찬호는 할아버지를 빼닮아 체격과 운동신경이 좋은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워낙 체격도 좋으시고 운동도 잘하셨어요. 찬호가 할아버지를 참 잘 모시기도 했고요. 할아버지 생전에 찬호가 할아버지를 업고 찍은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이 효를 중시하는 공주의 이미지에 맞아서 여기저기 많이 쓰이기도 했었죠."
-박찬호 선수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운동을 시작했는데 원래 운동을 시키려고 했나요.
"(손사래를 치며)아녀요. 그 당시에는 내가 못한 공부를 찬호에게 시키고 싶었어요. 이 녀석은 공부 쪽으로 키워야겠다 생각을 했었는데 초등학교 때 찬호가 특별활동으로 육상을 시작하더라고요. 워낙 찬호가 또래 애들보다 키가 커서 그랬나 봐요. 마침 그때 중동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창설되면서 주위에서 야구 시키면 잘할 것 같다고 권해서 처음에는 반대했었죠. 저는 주위 사람들이나 찬호한테 '운동해서 밥벌이라도 하겠냐,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계속 주장했지만 야구는 수업 끝나고 하는 것 아니냐고 주변에서 권하더라고요.
-주위 권유를 못 이기셨군요.
“사실 그때는 애들이 학교 끝나면 집에 와서 개울에나 놀러 다니고 산으로 놀러 다니는 게 일인데 또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어요. 그래서 차라리 그렇게 놀거면 사고도 방지하고 단체생활도 해볼 겸 야구를 시켰는데 공도 다른 선수들보다 빠르고, 뜀박질도 빠르다보니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했어요. 찬호도 그게 좋았나 봐요. 야구를 꼭 해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야구를 시킨거죠."
-언제부터 박찬호 선수가 두각을 나타내던가요.
"원래 초등학교 때까지만 야구를 시키려고 했는데 이 녀석이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다른 선수들보다 두드러지더라고요. 그 때 당시 3루수였는데 1루로 송구를 하면 공이 총알같이 가는 거예요. 그 때 감독님이 투수 한 번 해보라고 권하셨대요. 그래서 그 때부터 투수를 시작한 거죠."
-역시 대선수라 일찍부터 실력이 대단했나보네요.
"꼭 그런 것도 아니지요. 저는 찬호가 참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뭐 자기 자신도 노력은 많이 했겠지만 고 2때 전국대회에서 우승도 하고 하면서 이름이 알려졌죠. 그래도 그때 워낙에 조성민이나 임선동이 같이 대단한 투수들이 많아서 그 선수들은 국가대표로 뽑혔다는데 우리 찬호는 소식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암담하기도 하고 힘도 들고 했는데 운 좋게 가까스로 국가대표로 뽑혀 미국 가서 승리투수도 되고 하면서 미국 스카우터들 눈에 띈 거죠. 노력도 대단하지만 사실 운도 좋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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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선수의 노력은 국민들이 다 알고 있는데 운이라뇨. 박 선수의 노력과 부모님의 뒷바라지가 이뤄낸 성과겠죠.
"사실 찬호가 야구한다고 나선 당시에는 우리 집이 먹고살기 어려워 물질적 지원도 제대로 못했어요. 이 녀석이 장어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돈이 없어서 장어 한 판만 시켜놓고 같이 못 먹고 먹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죠. 찬호가 왜 안 드시냐고 물어보면 '나는 느끼해서 장어는 안 먹는다'고 둘러대고, 아들만 먹였죠. 나라고 왜 안 먹고 싶었겠어요. 그래도 아들 먹는 거 보면 행복한 게 부모 마음이라고, 넉넉하게 못 사준 게 오히려 미안하죠. 뭐 별로 해 준 게 없이 혼자 큰 아이라 뒷바라지라고 하면 부끄러워요."
-사실상 운동선수들 뒷바라지가 힘들다는데 역시 아버님도 힘드셨나보네요.
"지금 생각하면 찬호 고등학교 때 좋은 선수들이 많았어요. 뒷바라지를 잘해줬으면 더 큰 선수들이 많이 나왔을 겁니다. 당시 지방은 서울처럼 운동선수 뒷바라지에 대한 개념이 없었거든요. 뒷바라지는 3박자가 맞아야 된다는 것을 느꼈어요. 우선 어느 정도 돈도 있어야 되고, 운도 있어야 되고, 관심도 있어야 되더라고요."
-아드님 야구시킨 것이 가장 보람 있었던 때는 언제셨는지요.
"우선 야구를 해도 대학교를 가더라고요. 한양대를 비롯해 명문 대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많이 왔어요. 대학생이 된다니 그게 또 그렇게 좋대요. 또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찬호를 데려가겠다고 하니 그 때 기분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찬호 좋은 점만 얘기하면서 거기 팀에서 찬호가 가능성이 높다면서 말이에요. 참나, 그냥 데려가 준다고만 해도 보낼 판에 그렇게 아들 칭찬만 해주면서 맡겨달라는데 내 정신이 아니었죠. 무조건 보내고 싶다고 했죠."
-반대로 힘들었을 때도 있으셨겠지요.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는데 중2때 찬호가 3루수였어요. 그 때 타구에 손목을 맞아 아프다고 해서 찬물에 담그라고 하고 참으라고 했죠. 그런데 당시 부장선생이 전지훈련을 갔다가 찬호 폼이 다르고, 공을 무서워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에 데려갔더니 뼈에 금이 갔다고 깁스를 하고 집에 온 겁니다. 이 녀석이 한참을 모르고 야구를 계속 한 거죠. 안쓰럽기도 하고 미련해 보이기도 해서 낫고 나서 하지 그랬냐고 원망했는데 찬호가 '그럼 형들이 3루수 차지하는데 아프다고 빠지면 어떡하냐'고 그러대요. 혼자 노력해서 이 같은 결과가 있는 것 같아 안쓰럽고 그래요. 미안하기도 하고요."
-이번에 입단한 오릭스에서 15승도 기대하고 있던데요.
"내심 메이저리그에서 은퇴하길 바랐는데 찬호는 어차피 야구를 했으니까 지도자를 한다면 한·미·일 야구를 모두 접해봐야 한다고 하네요. 일본에서 잘하면 좋겠지만 그것보다는 일본 야구를 경험해본다는 의미로 간 것이다 보니 승수에 연연하기 보다는 일본 야구를 배우고 오는 것에 만족해요."
-박찬호 선수가 은퇴하면 무얼 했으면 좋으시겠어요.
"아직 현역인데 은퇴 같은 구체적 얘기를 하지는 않아요. 어차피 야구를 했으니 지도자가 됐으면 좋겠죠. 어쨌든 찬호의 꿈이 있지 않겠어요? 그냥 찬호의 꿈을 존중하고, 부모지만 내가 관여하기보다는 찬호가 직접 결정하는 거라고 봐요."
-아드님 덕에 뿌듯하시겠어요.
"사실 예전에는 초등학교 야구 전국대회라면 춘·추계리그 두 개 모두 서울에서 했어요. 그래도 찬호 이름으로 리틀야구장도 만들고 해서 공주시에서 전국대회를 유치할 수 있게 돼서 좋죠. 늘 뿌듯하고, 또 찬호가 매년 행사가 있을 때 참석해주고 해서 고마워요."
-마지막으로 운동하는 자녀를 둔 부모에게 조언 한마디 해 주세요.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것이에요. 나는 위로와 격려, 칭찬을 많이 해줬어요. 찬호도 그게 가장 컸다고 얘기해요. 인간은 기계랑 달라서 좋을 때가 있으면 안 좋을 때도 있잖아요. 특히 안 좋을 때 항상 같이 있어줬어요. '잘하는 애들도 못할 때가 있는 거고 너도 지금은 힘들지만 잘하게 될 수 있다. 다음에 잘하면 된다. 그것이 발전이다'라는 위로와 함께 정신적 지원이 더욱 중요한 것 같아요."
-아버님은 따로 계획하신 일이 있으세요.
"내년이면 나이가 70인데 뭐 별거 없어요. 사람만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사람 사는 건데 10년간 지금처럼 아무에게도 누가 되지 않고 동네분들과 어울려 농사도 짓고, 나눠먹기도 하고, 그런 거죠. 무엇보다도 찬호에게 누가 되지 않게 이렇게 살다가 여생을 마치고 싶은 게 소망이라면 소망이죠 뭐."
<논설실장> 정리=이한성 기자 hansoung@cctoday.co.kr
사진=허만진 기자 hmj1985@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