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다가 마주친 절경에 우리는 ‘와우(wow)’를 외친다. 그러나 요즘엔 ‘와우’ 대신 '올레(olleh)'를 외친다. 언제부터인가 올레는 하나의 여행 트렌드가 됐다.
너도나도 올레 길을 찾아 떠나고, 올레를 보고난 뒤 경배한다.
걷기인구 1000만 명 시대. 걷기산업 7000억 원대, 전국 200코스의 올레길.
이제는 동네마다 올레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 더욱이 올레를 찾아가다 만난 사찰이나 명소는 여행의 덤이다.
이번 여행은 충청도 올레다.
정확히 말하면 마곡사 인근 태화산 산행이고 솔바람길 순례다. 최근 전국적인 올레 열풍에 맞춰 충남도가 이곳을 올레의 메카 '솔바람길'로 키우고 있다.
천년고찰 마곡사도 보고, 솔바람이 부는 숲길을 걷다보면 발끝은 세상의 모서리를 돌아 행복한 정점에 이른다.
올레는 제주말로 '큰길에서 집 대문에 이르는 아주 좁은 골목길'이란 뜻이다. 지금은 자연친화적인 '트레킹 코스'라는 의미로 바뀌었다. 결국 자연과 눈 맞추며 느리게 걷다 보면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올레는 길의 속살을 보는 것이다. 차로 보지 못했던 풍경들을 마음속의 파인더에 담는 것이다. 제주도에 올레길이 있다면 충남에는 솔바람길이 있다. 충남도는 16개 시·군에 개설될 올레길(산책로) 이름을 '솔바람길'로 통일했다. 그 솔바람길의 중심에 있는 곳이 마곡사 태화산이다.
마곡사는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해발 423m) 동쪽 산허리에 있는 절이다. 640년(신라 선덕여왕 9년) 자장법사가 창건했는데 대전·충남지역 조계종 70여 사찰을 관장하는 대본산이다. 마곡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마(麻)가 많이 재배되던 골짜기(谷)에 지은 절(寺)에서 비롯됐다고 하기도 하고, 보조국사가 고려 명종 2년에 절을 재건하고 법문을 할 때 설법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로 골짜기가 마치 삼밭의 삼(麻)처럼 빼곡하다 하여 이름 붙였다고도 한다. 또 한 가지는 성주산문 개창자인 신라 무염 스님이 중국의 마곡사에서 법을 이어와 마곡사라 했다는 것이다. 택리지나 정감록 등에는 삼재(三災=전쟁·질병·기근)와 팔난(八難=배고픔·목마름·추위·더위·물·불·칼·병란)이 들지 않는다는 십승지지(十勝之地=열 곳의 뛰어난 땅), 또는 몸을 지키기 좋고 오래 살 땅이며 착한 정승과 좋은 장수가 나온다는 명승지로 기록돼 있다.
마곡사로 가는 길은 태화산에서 흘러내려온 맑고 차가운 희지천과 함께한다. 매표소를 지나 절 입구의 해탈문까지 1.5㎞ 가량 희지천변은 푸른 시냇물과 흰 바위의 청정한 노랫소리로 가득하다. 수량이 많고 깨끗해 입수(入水)의 본능을 일깨운다.
태극모양으로 휘돌아 나가는 숲길을 지나 마곡사의 정문인 해탈문에 이르면 중앙통로 양쪽 편으로 익살스러운 금강역사상과 해태를 탄 곱상한 문수동자상이 마중한다. 해탈문을 지나야 사바세계를 벗어나 비로소 불교세계에 들어간다고 한다. 희지천을 가로지르는 극락교 아래엔 지바롯데 김태균(한화 이글스) 선수가 보시했다는 거북이 한 쌍이 머리와 등을 내놓은 채 해탈하고 있다. 다리를 건너면 오른편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범종루가 있고, 바로 정면에 보물 799호인 5층 석탑과 대광보전·대웅보전이 아늑한 가람배치를 자랑한다. 대광보전은 100일 기도를 드린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어 나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5층 석탑은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축조된 독특한 탑으로 세계적으로 3곳 밖에 없다. 탑 왼편 응진전 앞에는 멋들어진 향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백범 김구 선생이 마곡사 승려생활을 기념해 심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지금은 상사화가 사찰 곳곳을 수놓고 있다.
대광보전 현판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인 강세황, 대웅보전은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라고 알려져 있고, 영산전(보물 800호)은 김시습을 만나러왔던 세조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며 남긴 글씨라고 하니, 역대 명필들의 글씨 감상은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다. 특히나 대웅보전은 단청이 바래 고즈넉한 기풍이 돈다.
마곡사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로도 유명하다. 주말을 제외하고 연중 상시 휴식형 템플스테이를 진행한다. 이곳 템플스테이에는 불교의 교리를 강요하는 어떤 노력도 없다. 108배, 참선, 발우공양의 의무가 없는 그래서 '휴식형'이라 불리는 새로운 형식의 템플스테이다. 1박2일 동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혼자' 생각하는 것이다. 새벽 예불, 참선, 발우공양의 참여 여부를 택하는 것은 모두 참가자의 몫이다. 서로의 마음을 나눔으로써 나의 마음을 반추해보는 '자비 명상 템플스테이'와 산길을 맨발로 걸으며 마음을 조절해 자연을 즐기는 '맨발 산행'이 가능하고 일상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욕망에서 벗어나서 잠시 고요한 산사에서 수행자의 삶을 체험한다.(인터넷 홈페이지 www.magoksa.co.kr나 전화(041-841-6226)로 신청)
태화산 산행은 보통 은적암 입구에서 시작한다. 제1코스는 마곡사~은적암 입구~영은암~활인봉~제2코스 갈림길~나발봉~유물관~마곡사, 또는 마곡사~은적암 입구~백련암~마애불~활인봉(약 3시간 소요), 2코스는 마곡사~은적암 입구~활인봉~주능선 갈림길~샘골~마곡사(약 2시간 소요), 3코스는 마곡사~백련암~영은암~마곡사(약 1시간30분 소요)다. 솔바람길로 정한 6코스는 ①마곡사 가는 길(마곡사 관광지~천연송림욕장 2㎞), ②백범 명상길(천연송림욕장~은적암~백련암~활인봉 2㎞), ③명상 산책길(활인봉~생골길~아들바위 1.5㎞) ④솔잎 융단길(아들바위~나팔봉 1.5㎞) ⑤황토 숲길(나팔봉~전통불교문화원 2㎞) ⑥불교문화 유물길(전통불교문화원~마곡사 2㎞)이다. 이 가운데 '백범 명상길'(19㎞)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왕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1895년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뒤 마곡사로 도피해 구국의 의지를 불태우면서 거닐었던 소나무숲 길이며, '솔잎 융단길'은 융단 모양의 솔잎으로 뒤덮인 오솔길로 맨발 산책길로 적합하다. 목재데크길, 백범교, 야생화로 단장된 쉼터 등을 조성해 절경을 즐기며 운치 있게 산책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올레 길은 기계를 사용해서 길을 내지 않아야 하는데 곳곳에 돈으로 밀어붙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놀멍 쉬멍'(놀며 쉬며), '꼬닥꼬닥'(느릿느릿 천천히) 손으로 돌을 옮기고 땅을 고르지 않고 '공구리'를 친 느낌이 든다.
우리 일행은 1코스를 택했다. 가장 긴 코스이지만 태화산의 깊은 정취를 모두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백련암으로 가는 길은 적송들의 군락지다. 수령이 반세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송림은 8등신의 미녀처럼 붉은 종아리를 드러내고 있다. 더욱 이채로운 것은 마곡사를 등지고 태화산 안쪽으로 접어들면 소꿉놀이 같은 집들이 옹기종기 박혀있다는 점이다. 속세를 떠난 듯 마을은 침잠한다. 논두렁은 정겹고 싱싱한 채소밭도 청정하다. 물론 봄의 산사 풍경과 주변 경치가 빼어나 ‘춘(春)마곡’으로 불리는 것을 보면 가을 초입의 산세는 조금은 초라해 보인다.
백련암은 가파른 오르막을 이겨내야 볼 수 있다. 백범 선생이 3년 동안 속세를 등지고 승려 생활을 했던 이곳은 마곡사의 부속 암자다. 백범은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물도 긷고 장작도 패며 6개월 동안 스님생활을 했다. 백범의 정기가 흐르는 듯 백련암의 풍치는 정적이고 애잔하다. 이곳의 약숫물은 적당한 냉기를 품어 달짝지근하다.
백련암과 은적암을 돌아보는 길엔 온통 밤나무 길이다. 알밤의 특산지임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공주시의 알밤줍기 행사는 밤 줍기 외엔 별다른 이벤트가 없는데 사람들이 몰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낸 돈만큼 밤을 주워갈 수 있어서다. 더구나 천안~논산 고속도로에 대전~당진 고속도로, 서천~공주 고속도로가 개통돼 사통팔달 접근성이 좋아 많이들 찾는다. 공주 햇밤은 떫지 않고 달다. 보통 밤은 당도가 15브릭스인데, 공주 밤은 평균 19브릭스다. 19브릭스라면 웬만한 과일보다 높다. 이유는 수분 차이다. 45일 정도 영하 1도에서 숙성시키면 당도는 31~32브릭스까지 올라간다.
태화산은 어찌 보면 겸손한 산이다. 일단 높이가 낮다. 겸양의 미덕을 떠받드는 것처럼 산세는 바짝 엎드려 있다. 산이 야트막해 도보와 등산의 중간 정도라고 보면 된다. 태화산은 어려운 바윗길이 거의 없을 만큼 내내 편안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노송길을 걷는 것도 장점이다. 더구나 등성이만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으면서 여러 개 봉우리를 타고 넘어 좋다. 나발봉과 활인봉 두 봉우리에 정자가 있고, 곳곳에 긴 의자가 놓여 있어 산행 도중 쉬기에 좋다. 좀 가파른 곳에는 통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아 편리하다.
하지만 아무리 낮아도 산이고, 아무리 완만해도 산인 법이다. 일행 중 한 명이 생골길을 오르다 체력이 바닥났다. 이정표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코스를 자주 잃어버린 게 화근이었다. 가다보면 민가가 나타나고 막다른 길(사로·死路)이었다. 올레정신을 잊게 했다. 올레란 것이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길에 그려진 화살표 표시 따라 걷는 것인데 지도를 봐도 엉뚱한 길로 빠지고, 산세를 훑어봐도 곁길로만 빠졌다. 이때부터 놀며 쉬며 걷는 '올레'는 극기 훈련으로 바뀌었다. 퍼진 동료는 얼굴 색소를 완전히 뺀 얼굴로 일행을 따랐다. 낭패였다. 예습을 하지 않는 올레는 결국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 일행은 사력을 다해 능선을 찾아 올랐다. 애초에 길이란 없어 많은 사람들이 걸으면 그것이 길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는 없지만, 조금은 불편한 것이 올레다. 이때부터는 발로 걷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걷는다. 올레의 초심대로 각자의 속도대로 길을 걸으며 그 위에서 치유 받고 위로한다. 3시간 30분에 걸친 산행은 이후에도 여러 번 길을 잃고 주소를 잃고 헤맸다. 생골서 헤매고 나발봉서 헤매고 마곡사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헤맸다. 가히 산이란 길손에게 함부로 내어주지 않음을 절감했다. 때마침 태화산 북편의 상원계곡을 만나 이 모든 노정(路程)과 사념을 적셨다. 상원계곡은 수량이 넉넉하고 그늘이 넉넉하고 바람이 넉넉하다. 속도는 나지 않았으나, 그 느린 만큼 솔바람길 올레는 충분히 사랑스러웠다.
공주(마곡사)=나재필 기자 najepil@cctoday.co.kr
사진=우희철 기자 photo291@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