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를 던진다. 왜 떠나야만 하느냐고? 여행 전날 풍각쟁이처럼 폭음하는 습관은 이런 화두로부터 출발한다.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자유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다.
새들이 먹이와 번식만을 위해 수천, 수만리의 먼 여행을 떠나겠는가. 미래를 위한 시간, 미래를 위한 비행을 위한 거다.
이번 여행지는 영동 민주지산이다.
민주지산(1241.7m)은 충청도·경상도·전라도가 만나는 곳에 있다. 북쪽으로는 국내 최대 원시림 계곡인 물한계곡과 각호산(1176m)이 이어지며, 남동쪽으로는 석기봉(1200m)과 삼도봉(1176m)이 이어진다.
이 중 삼도봉은 충북 영동군과 경북 김천시, 전북 무주군의 경계가 만나는 지점이며 백두대간상의 산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해도 심심산골 오지의 대명사 격이었던 곳으로, 높은 산과 깊은 계곡으로 첩첩이 장막을 치며 길손의 발길을 거부해왔다.
하지만 도로망이 발달함에 따라 이제 민주지산도 전국 어디서나 하루산행이 가능해졌다. 충북 영동은 포도와 감의 고장이자 국악의 본향이기도 하다.
입이 달콤한 것은 향이 나기 때문이고, 눈이 즐거운 것은 음악으로 인해 귀가 열리기 때문이다. 특히나 9월 3일부터 7일까지 이곳에선 오감이 즐거운 포도·국악축제가 한바탕 벌어진다.
영동=나재필 기자 najepil@cctoday.co.kr 사진=우희철 기자 photo291@cctoday.co.kr
△여정을 열며=맑음. 33도
대전에서 황간IC를 통해 내처 달렸더니 1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 제법 성능 좋은 차라고 생각했는데도 도마령에선 저속기어도 숨을 헐떡거린다. 더위에 지치고 가파른 오르막에 지쳤기 때문이다. 과부하가 걸린다. 슬슬 여우비도 내린다. 엔진이 타들어가다 말고 빗물에 화기(火氣)를 토해낸다. 도마령을 넘어 10분도 채 되지 않아 목적지인 민주지산 자연휴양림(영동 용화면 조동리)에 도착했다. 여장을 푼다. 인체에 가장 적합한 기압상태가 해발 700m라고 하는데 이곳 휴양림이 바로 700m고지다. 전국의 자연휴양림이 대부분 해발 200~300m에 있음을 볼 때 독특한 경우다. 황토로 만든 숙박시설은 750m에 있다. 이곳에서 여장을 풀어본 사람이라면 5~6시간만으로 충분한 수면효과를 얻을 수 있고, 피로회복도 저지대보다 2~3시간 빠름을 느낄 수 있다. 고기압과 저기압이 만나는 지역으로 인간의 생활과 모든 동식물의 생육에 최적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민주지산의 산 이름은 두 가지다. 주민들은 삼도봉에서 각호봉까지 산세가 민두름(밋밋)해서 '민두름산'으로 부르던 것을 일제가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민주지산'으로 이름을 붙인 것으로 알고 있다. 민주주의(民主主義)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지만 백운산으로 부르던 것을 일제가 산의 격을 낮추거나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민주지산으로 개명했다는 설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조선 성종 때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과 반계 유형원의 동국여지지에 나오는 백운산을 지금의 민주지산으로 보고 있다. 물론 역사서에 나오는 백운산이 무주에 있는 백운산이라는 주장도 있다.
영동군이 자랑하는 관광명소와 특산품들을 얘기하다 보면 항상 민주지산이 따라붙는다. 군의 대표적 관광지인 물한계곡은 민주지산에 둘러싸여 있다. 물한계곡은 물이 차다는 한천마을 상류에서부터 20여㎞를 흐르는 깊은 계곡이다. 폭포와 숲이 조화를 이뤄 등산객과 피서객들로 사계절 붐빈다. 원시림을 보존하고 있어 생태관광지로 손꼽힌다.
△산행을 시작하며=비. 32도
산행은 임도를 따라 시작된다. 임도 방향은 수 갈래로 나뉘는데 이정표가 잘돼있어 헷갈리지 않는다. 남들은 부드러운 산세라고 하지만 등산 초심자에게 민주지산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가파른 둔덕은 고행길에 접어든 것 마냥 살짝 두렵기까지 하다. 숲길에 접어든 순간 시간과 시각을 잃을 만큼 색깔이 온통 청록빛이다. 빛을 쏙 빼버린 그늘이다. 그늘은 그림자이기에 볕이 들지 않는다. 비가 내린 탓에 계곡물은 조금 불어있다. 염치 불구하고 '풍즐거풍(風櫛擧風)'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옛 선비들이 여름에 숲을 찾아 상투를 벗어 산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고 중요 부위(거시기)를 드러내 볕을 쬐는 것이다. 이는 연중 응달에 갇혀 살았던 국부를 태양의 양기 앞에 노출시켜 음기를 축출하기 위함이다. 물론 일행이 있어 사념에 그치고 말았다.
빗방울이 굵어지나 비는 나무를 뚫지 못한다. 나무를 뚫더라도 빗방울은 소금크기로 소리 없이 증발한다. 빗방울은 시원하다 못해 얼음장 같다. 앞사람을 따라 힘겹게 오르다 만난 용화천 발원지. 민주지산 정상 아래쪽에 있는 작은 샘터다. 그러나 용화천이 금강이 되는지, 한강이 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샘터는 웅덩이 정도도 안 되는 작은 규모다. 작은 물이 큰물이 되고, 개천이 강이 되는 위대함을 잠시 체득한다.
△산 정상을 딛고=안개비. 21도
민주지산 정상(1241m)에 오르면 각호산, 석기봉, 삼도봉을 비롯해 주변의 연봉들을 두루 굽어볼 수 있다. 그러나 산행한 날은 묵직한 비 때문에 사위(四圍)가 안개바다(雲海)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몽매간에 구름을 올라타고 앉은 기분이다. 산 정상은 10도의 기온을 빼앗아갔다. 산 아래보다 10도나 낮은 21도를 가리킨다. '여름'에서 출발한 산행이 2시간 오르자 '가을'로 변한 것이다. 재작년 산행 때에는 눈이 발목까지 닿는 설산이었는데 이번엔 그저 고산(高山)이었다. 일행들이 증거로 삼을 인증 샷을 찍느라 분주하다. 충북에서는 소백산(1439m) 다음으로 높은 산이기에 정복감에 충만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정복당하는 것을 모두는 알고 있다.
△하산하며=소낙비. 25도
작살비가 쏟아진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내린다. 하산길이 더 무겁고 무섭다. 일행들은 종종걸음 치기 시작한다. 우중산행(雨中(山行)의 묘미는 비를 그대로 떠안는 것이다. 깜깜한 적막감은 피로를 동반해 으스스함으로 변이된다. 모두들 뛰어서 내려간다. 제2의 심장인 발이 곤함을 느낀다. 소나기가 온 뒤의 청명한 하늘처럼 험한 길과 준령을 넘어온 사람에겐 인생의 향기가 묻어 있다. 우리 인생이란 향기로울 때만 행복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평범을 버리지 않는 인간이 행복한 법이다. 산에 오를 때 비는 나무를 뚫지 못했지만 하산 길에 떠안은 빗줄기는 계곡의 몸집을 한껏 불리며 송림을 적신다. 대화도 이미 멎은 지 오래다. 투명 옷을 입은 것처럼 속살이 드러난다. 시스루룩 패션이다. 하산 시간은 예상대로 오를 때보다 곱절은 빨랐다. 비가 걸음을 따라오지 못했을 정도다.
△석찬=흐리고 비. 28도
영동은 '별 볼일'이 많은 곳이다. 해발 700m에 있는 민주지산 휴양림의 밤은 별천지다. 휴양림 뒤편에 올라 하늘을 쳐다보면 오로지 별만 보인다. 깜깜한 흑(黑)에 백(白)이 가득하다. 이래서 영동을 '별들의 고향'으로 부르는 것이다. 별밭에는 은하수가 남북으로 뻗어있다. 도시에서 이런 별구경을 할 리 없다. 그래서 일행 모두는 한참동안 고개가 꺾이도록 별만 봤다. 이른 저녁 별천지에서 내려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도착해서도 라면, 간식으로 라면, 석찬으로도 라면을 먹는 것이다. 소주를 못 마실 정도로 배가 부르다. 등심과 삼겹살을 양껏 준비했는데 모두들 고기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야외에서 고기를 외면한다는 것은 몸이 피곤하다는 징조다. 모두들 바닥에 이불도 깔지 않고 곤한 시골의 밤을 재웠다.
▶민주지산 휴양림 현황
민주지산 자연휴양림은 국악동, 포도방, 싸리버섯동, 버섯동, 감나무동, 목이버섯동, 야생화동, 능이버섯동 등이 있다. 3만5000원에서 10만원가량 하는데 여느 곳처럼 성수기(7월 1일부터 8월 31일)엔 오른다. 휴양림 오솔길에 조성된 맨발숲길은 240m, 삼림욕 거리는 13.4㎞다. 단체는 30인이상 30% 할인.단체연수 및 세미나실 이용객을 위한 숲속수련장은 100~18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문의 043-740-3437~8.
▶민주지산 자연휴양림 가는 길
△일반국도(청주·보은 방면):영동IC(무주·영동방면 12㎞)→영동읍(대전·무주방면 300m)→부용사거리(장수·무주방면 8㎞)→묵정삼거리(용화방면 18㎞)→용화삼거리(황간·상촌방면 8㎞)→ 민주지산 자연휴양림
△대진고속도로(광주·대전 방면):무주IC 우회전(영동·설천방면 6㎞)→오산삼거리(성주·설천방면 12.8㎞)→무항삼거리(용화방면 1㎞)→용화삼거리(황간·상촌방면 8㎞)→민주지산자연휴양림
△경부고속도로(서울·부산 방면):황간IC(좌회전 2㎞)→신탄리삼거리(경남주유소앞 좌회전) 돈대삼거리(우회전)→상촌삼거리(무주·용화방면 1㎞)→하도대삼거리(무주·용화방면 20㎞)→민주지산자연휴양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