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전북 익산은 백제사를 둘러싼 수수께끼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사실들이 감춰진 주무대다.
백제 관련 유적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사실들이 나오면서 이제 익산은 백제사의 중앙 무대로 서서히 자리를 옮기고 있다.
익산이 주목받고 있는 것은 백제 무왕(600~641)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주요 활동 무대가 이곳이었다는 데서 출발한다.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 쌍릉 등 백제 관련 유적이 무왕과 연결되면서 수 많은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서 나타난 사실들이 각각의 시나리오를 뒷받침하면서 후기 백제사의 퍼즐이 맞춰지고 있다.
전북 익산엔 당시 동양 최대 사찰이었던 미륵사와 왕궁리유적 등 상당한 불교문화유적과 현재의 익산토성 등 성곽, 궁궐지 등이 분포하고 있다.
백제 말기인 7세기 즈음에 조성한 유적·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무왕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쌍릉도 있다.
또 삼국유사엔 한국판 러브스토리를 대표하는 서동설화가 전해지는 데 여기선 서동(무왕)의 유년시절 주요 무대가 지금의 익산으로 묘사돼 있다.
‘서동요’를 퍼트리는 중상모략(?)으로 신라 공주와의 결혼에 성공한 뒤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의 정표로 부여 궁남지와 익산 미륵사가 조성됐다고 전한다.
무왕의 고향이 익산이었다는 사실에 수많은 유적·유물이 더해지면서 백제사에서 익산이 점하는 위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주목받는 유적이 바로 왕궁리유적이다.
20여년 동안 지속된 발굴조사를 통해 상당한 성과물이 도출됐다.
백제 왕궁으로는 처음으로 치밀하게 계획된 왕궁의 외곽경계와 내부구조가 확인됐고 왕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금제품과 유리제품, 수부(首府)명 인장기와, 전달린토기, 연화문 수막새 등이 출토돼 왕성으로서의 위치를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일본에 남아 있는 ‘관세음응험기’라는 사서는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백제 무강왕은 정관 13년(무왕 40년·639) 지모밀지로 천도해 정사를 새롭게 조영했다. 다음 해에는 하늘에서 큰 벼락과 비가 내려 제석정사가 재앙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익산천도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몰락한 왕족에서 갑작스레 왕이 된 무왕이 백제 부흥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면서 새롭게 내부적인 체제개편을 선택했을 개연성도 충분이 있어 보인다.
물론 왕궁리(王宮里)라는 지명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익산이 백제말기에 차지하는 비중엔 공감하면서도 천도에는 부정적인 견해도 있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국가적 대사인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이 같은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고 결정적인 증거도 아직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백제부흥의 최고 정점이었던 사비백제 시대 귀족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을 것인 만큼 천도는 이뤄지지 않았을 것으로 잠정 결론짓고 있다.
그래서 익산을 사비백제 제2의 수도로 보거나 무왕이 천도는 못하고 익산을 경영만 했다는 주장이 여전히 남아 있다.
박정희 정권의 임시행정수도계획(백지계획)이나 참여정부의 행정도시계획과 같은 맥락이다.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의 논리와 권세는 무소불위(無所不爲)였나보다.
어쨌든 왕궁리유적은 백제 무왕대에 왕궁으로 건립돼 경영되다 후대에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찰이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현재 왕궁리유적인 건립시기는 불분명하지만 백제석탑의 양식을 띤 5층석탑이 남아 있다.
◆선화공주는 어찌할고
현재 남아있는 확실한 백제 석탑은 정림사지5층석탑(부여·국보 제9호)과 미륵사지석탑(익산·국보 제11호), 단 2기 뿐이다.
이 두 석탑 가운데 어떤 것이 먼저인지에 대해선 여전히 이견이 있다.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석탑의 양식을 놓고 각자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미륵사지석탑이 보다 앞서 만들어졌다는 연구결과가 먼저 나오면서 미륵사지석탑이 한국 석탑의 시원으로 인정받아 왔지만 1981년 충남대박물관이 정림사지 발굴조사 보고서를 내면서 기존 학설를 뒤집는 연구결과를 제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석탑 해체(복원)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다.
미륵사지석탑 중앙부에서 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은제허리때양식 등 사리장엄이 모습을 드러낸 것.
특히 금제사리봉안기엔 백제 무왕대인 639년을 뜻하는 ‘己亥年(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미륵사지석탑의 건립연대는 명확해 졌고 이제 정림사지만 남았는데 그 결과에 따라 우리 나라 고고미술사의 첫 페이지가 새롭게 쓰여질 수도 있다.
그런데 미륵사지석탑 사리봉안기는 미륵사 창건 연대를 명확히 했지만 창건 주체에 대해선 학계를 혼란에 빠뜨렸다.
삼국유사(서동설화)에 따르면 무왕의 부인은 분명 신라 선화공주다.
무왕과 선화공주가 지금의 미륵사지 뒤편에 서 있는 용화산 사자사(師子寺)에 행차했을 때 용화산 못에서 미륵삼존이 륵사지 전경. 동측 석탑은 모형이고 서측 석탑(국보 제11호)은 현재 복원 중이다. 복원된 미륵사지석탑은 2014년 이후에나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나타나 경의를 표한 뒤 선화공주가 무왕에게 절을 세울 것을 청했고 무왕이 사자사 지명법사의 도움으로 하룻밤새 못 을 메워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미륵사지석탑에서 나온 사리봉안기엔 창건 주체가 ‘백제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기록돼 있다.
무왕의 부인이 당대 최고 관직인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라는 얘기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는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됐다.
이기준 기자 poison93@cctoday.co.kr
사진=김상용 기자 ksy21@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