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기자다.' 말 그대로 글 쓰는 사람인 기자(記者)다. 하지만 '너는 작가다.' 이립(而立)을 갓 넘은 때에 한국 판타지문학의 신성불가침을 깨버렸다. 우리가 알고 있던 판타지문학의 도식화된 텍스트를 버린 것이다. 마법과 요술지팡이를 쓰는 해리포터와 볼드모트가 아니라, 누구나 한번쯤 사유하는 무릉도원의 실체를 눈앞에 목가적으로 펼쳐보였다. 때론 진지하게, 때론 감성적으로 텍스트는 인간과 무릉도원의 본질을 집요하게 캐묻는다. '2011 조선일보 판타지문학상'을 수상한 본사 정진영 기자의 '도화촌 기행'이 출간됐다. 그를 지난 주말 인적이 끊긴 모처에서 만나 '통음(痛飮)의 인터뷰'를 했다. |
'도화촌 기행'은 곧 마흔이 되는, 마지막 2차 시험 이후 5년째 '해걸이'를 하고 있는 고시생 범우의 이야기다. 사법시험 1차를 마치고 길을 헤매던 주인공은 우연히 도화촌(桃花村)에 들어간다. 그는 그 현실과 이계 사이의 경계에서 도화촌 사람들과 선문답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곧 '무릉도원'의 실재를 사유하는 이야기다.
-도화촌 기행을 쓰게 된 이유는.
"낙원이라고 부르는 무릉도원의 실재에 대해서 뒤집어 생각해보고 싶었다. 대학 때 '무릉도원'의 저자 도연명의 시문(時文)을 수없이 탐독했던 것도 이유라면 이유다."
-(단도직입적으로) 책은 잘 팔리나.
"그런 편이라고 들었다. 큰 욕심은 없지만 장편으로는 처녀작이자 출세작(?)이기 때문에 기대를 좀 하긴 한다. 그렇게 묻는 나 위원은 사서 읽었나."
"(하하) 읽었다. 책이 나왔다는 소식에 제일 먼저 서점으로 뛰어가 잉크도 채 안 마른 생물(生物)을 샀다. 그리고는 6시간 만에 읽어버렸다. 며칠 뒤 또 읽었고 인터뷰 때문에 또 한 번 읽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서평처럼 재밌게 잘 읽히더라."
장마가 제 몸을 불리고 떠난 계곡, 그 개울 안에 돌을 쌓아 '술마당'을 만들고 소주를 마셨다. 인터뷰어, 인터뷰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치기(稚氣)’가 동한 것인데 여름 물속이라 취기마저 돌지 않았다.
-'엄마를 부탁해'의 신경숙은 171쇄,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무려 290쇄까지 찍었더라. 무슨 풀빵공장도 아니고…. 당신은 과연 몇 쇄나 찍게 될까.
"이제 시작이니 큰 욕심은 없다. 다만 차기 작품을 위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봐줬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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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화촌 기행'을 쓴 본사 정진영 기자와의 인터뷰는 장마가 끝난 계곡에서 진행됐다. 개울 안에서 돌좌석을 만들고 수중(水中) 인터뷰를 하며 글과 인생, 사랑 얘기를 들었다. 물론 통음하면서. |
-솔직히 290쇄까지 찍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훈계하고 설득하는 것 같아 중간 정도 읽다가 접었다. 김 교수 책보다도 재밌게 읽었다. (그건 그렇고) 소설 속 경선과의 로맨스 라인을 깊게 할 생각은 없었나? 사법연수원생에게 버림받은 그녀를 통해 혹시 실연의 아픔을 유예하고 있는 건 아닌가.
"소설 속 여주인공은 변절해서 도망친 실존의 옛애인이 아니라 나의 또 다른 얼굴이다. 생각하면, 한 여자 때문에 20대 청춘이 송두리째 날아간 것이 간혹 억울하기도 하다. 20대는 잃어버린 퍼즐 속 조각이다."
-세상에서 절대로 말릴 수 없는 세 부류가 있다고 한다. 마약하는 사람, 선거 나가는 사람, 그리고 고시 치르는 사람. 김난도 서울대교수의 젊은 시절과도 닮았다. 어렵게 고시를 접은 것. 애인의 변절. 그리고 현재 새로운 길을 가고 있는 모습 말이다.
"고시촌은 서울 안에서 또 다른 섬이다. 그 고시 촌 안 고시생들도 각자의 섬을 가지고 있다.(130쪽) 고시공부 내려놓는 거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글을 통해서, 고통스러웠던 삶과의 농밀한 재회를 통해서 과거와 화해했다. 비관을 만회했다고 보면 된다."
-솔직하게 말해라. 사법시험에 미련이 남았는가, 지금이 더 행복한가.
"행불행을 따지긴 어렵다. 다만 책을 냈고 상금을 탄 것은 의식주 자립에 작은 밀알이 될 것이다. 의식주 자립이야말로 진짜 사람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바라보면 예전보다 조금은 행복해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소설 속 노인을 보며 불교 초기 경전 아함경·법구경의 미륵(부처)을 연상했다.
"틀렸다. 부처가 아니라 소설 속 노인네는 삼천갑자동방삭(東方朔)이다. 동방삭은 중국 전한(前漢)의 문인으로 막힘이 없는 유창한 변설과 재치로 한무제의 사랑을 받은 인물이다. 속설에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 먹어 장수했다고 전해진다. 눈치 챘는지 모르겠지만 주인공을 현실과 이계로 넘나들게 하는 고양이가 바로 노인네다. 비래사 근처 길양이(버려진 고양이)의 몸짓과 울림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놀랍다. 나도 고양이가 노인네의 분신인줄 몰랐다. 그렇다면 ‘조연급’으로 나오는 홍 씨와 전상덕은 누군가.
"주인공과 선문답(禪問答)을 하는 인물이지만 결국 그들도 '나'라고 보면 된다. 거울에 비친 사유 속의 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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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도원을 소재삼은 것은 괴로운 현실에서 일단은 피하자는 도피 차원이 아닌가.
"욕망은 고통이다. 그 욕망으로 얻는 만족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큰 걱정 없이 굶지 않으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자체가 무릉도원이다. 바로 지금 현실, 그 자체가 무릉도원인 셈이다. 무릉도원은 있지만 없는 곳이기도 하다. 결국 무릉도원은 평화로운 지옥일 수도 있다."
그는 절에서 6개월 간 칩거하면서 속세와 이세(二世)를 오고갔다. 힘들면 속세에 내려가 술을 길어다 먹고 다시 원고지를 붙들었다. 원고지는 그의 고통과 기억을 털어놓는 과정이었다. 어쩌면 복기(復棋)였을 수도 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바둑돌'을 던져봄으로써 사랑과 인생, 어디가 문제였는지 점검한 것이다.
그가 아이패드 어플로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악보를 볼 줄 몰라도 그의 연주 실력은 수준급이다. 요즘 최대관심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나왔다.
“여자 그리고 결혼이다. 빨리 짝을 만나고 싶다. 종교가 없었으면 좋겠고 연상의 여자면 더 좋을 것이다.”
-소설 내용 중 40억 로또에 당첨됐다. 로또 당첨과 사랑 중에 굳이 택하라면.
“40억이라는 돈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모습에 자기혐오감을 느끼면서도 욕망의 노예가 되어 추한 행동은 다 보였다(242쪽)는 소설내용이 있다. 그런데 40억이라면 돈을 택하겠다. 난 속물이다(하하).”
'순식간에 거리는 꽃비로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눈물까지 찔끔 흘릴 정도였다'(17쪽). 글에서 말하듯 그는 속물이 아니라 진짜 진국이다. 그는 사랑과 일, 원칙에 대해 변절하지 않는다. 우스갯소리로 그는 11년째 휴대전화(016·KT)번호를 바꾸지 않고 있다. KT에서 '010'으로 바꾸라고 성화를 대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기업이 사익을 위해 고객의 권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 그다.
-문장이 유려하다. 타고난 것인가.
“다독(多讀) 하는 편이다.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읽는다. 편독(偏讀)하지도 않는다. 결국 창작의 자양분은 독서인 셈이다.”
-차기 작품이 벌써 궁금해진다.
“사람얘기를 쓰고 싶다. 가령 신화와 설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써볼까 한다. 춘추전국시대 신화이자 지리서(地理書)이기도 한 산해경을 모티브로 하면 어떨까 싶다.”
이번 책이 그에게 날개를 달아줬으면 좋겠다. 판타지문학상 심사위원이었던 장경렬(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과) 교수는 '리얼리즘 소설의 범주이면서 환상문학의 영역을 넓혀준 작품'이라고 칭했고, 박성원(소설가·동국대 문창과) 교수는 '그간의 환상문학 경계 자체를 허물었다. 새로운 환상문학의 출현'이라고 극찬했다. 이들의 서평은 세 번을 읽은 독자의 입장에서 봐도 옳다.
인터뷰를 끝내며 ‘그가 글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글이 그를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 밤 녹음 짙은 시계(視界)가 가슴으로 진하게 내려앉았다. 우리는 다시 술잔을 부딪쳤다. ‘문(文)을 위하여~’ 건배.
나재필 논설위원 najepil@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