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지역을 찾아본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 세월을 따라 사람도 변하며 시간에 따라 정의와 도덕도 변하는 추세지만 보은지역의 청정자연인 하늘과 산과 들과 물은 변하지 않는다고 감탄한다.
아주 조금 변형이 있을 뿐이다. 유한의 생명체인 인간이 자연을 경외하는 까닭은 10년 아니, 100년쯤은 아무 것도 아닌 변하지 않는 영원성 때문이다. 변하는 것들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동경한다.
얼마 전 우리 나라 국민들을 상대로 좋아하는 나무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는데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반 이상이 소나무를 꼽았다고 한다. 하긴 소나무의 한자어인 송(松) 자는 나무목(木) 자에 벼슬공(公) 자로 구성되어 있어 이름부터 이미 벼슬을 한 귀한 몸이거니와 서원리의 정부인송은 거기에 국가지정 문화재인 속리산 정이품송의 부인목으로 정경부인 반열에 올랐으니 귀하신 몸이 아닐 수 없다. 600년을 변치 않고 서있는 '정부인 소나무'다.
속리산 천왕봉(1057m)에 내린 하나의 빗방울이 동으로 떨어지면 그것이 낙동강 물이요, 서·북으로 떨어지면 한강수가 되고, 남으로 떨어지면 금강이 되어 흐르니 금강으로 흐를 그 빗방울이 한 번은 삼가저수지에 모인다. 이어 서원계곡을 따라 흐르고 흘러 금강에 이른다. 우두커니 앉아 계곡의 맑은 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한 느낌이 든다.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였다. 최상의 도는 물과 같다는 것이다. 물이란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며, 물은 어느 그릇에서도 자유롭게 자기 형체를 바꾼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는 자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은 스스로를 낮은 곳에 두어 남과 더불어 승리를 다투지 않고, 대립하지 않으매 마땅히 사람이 배워야 할 위대한 도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부드러운 물이 강한 돌을 이긴다. 물의 영구불변한 진리의 상징성 때문인지 맑고 좋은 물을 보면 어느 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특히나 명산 속리산에서 발원되어 금강의 발원이 되는 서원계곡의 맑은 물은 이 계곡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니
서원계곡을 따라 난 505번 지방도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목장승 한 쌍이 서 있다. 그 곳이 저 유명했던 1893년의 동학 취회지다. 장승에는 '사람이 곧 하늘이니' 와 '동학농민혁명만세'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동학교도들은 왜 하필 장내리에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했을까?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의 역량으로 급격히 늘어난 동학교도들은 교세를 정비하고, 교단의 지도부가 근거지 없이 떠돌아서는 전국의 교도들을 지휘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보은의 장내리에 대도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보은은 호남, 영남, 충청을 아우르는 중심지였으며, 오랫동안 군현과 도의 경계를 넘나들며 피신생활을 해야만 했던 교단 지도부들이 갑작스런 관군의 출몰에 대비해 피신이 용이한 산악지형일 뿐만 아니라 호남, 충청, 영남의 3도 경계지역이기도 하다. 물론 상주, 청산 등 가까이에 교도가 많은 것도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1893년 정월 장내리를 동학 동학교도의 대도소로 결정하자 이 때부터 장내리는 전국적인 동학의 근거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장내리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삼가천과 옥녀봉 사이의 비탈에 돌성을 쌓았다. 이 돌성은 경향 각지에서 온 교도들의 질서를 도모하고 바람도 막으면서 한편으로는 돌성을 쌓는 작업을 통해 협동심을 기르는 과정으로 생각된다. 100여 걸음의 길이와 반장(허리춤)까지의 높이로 쌓았으니 수 만 명의 숙련된 농민들로서는 단시간에 쌓았을 것이다. 지금도 장승을 세워둔 논둑은 그들의 손길이 닿은 돌로 희미한 흔적을 남겼을 뿐이다.
동학농민들이 구름과 안개 메워지듯 수 만여 명이 모여 19세기 말 불합리한 사회개혁과 척양척왜의 외세배척의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의지와 간절한 바람이 이젠 희미한 돌성의 자취로 남아 있으며, 11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정신을 기리는 듯 목장승만이 한여름 들판을 지키고 서 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니 서로 섬기세"라며.
◆우리가 알아야 할 다섯 분의 선비 -상현서원-
여러 의미에서 서원·장안리에 사는 이들은 참으로 축복받았다. 아름다운 산이 있고 그 산의 정기를 받은 계곡의 맑은 물이 마을 앞을 흐르니 아마 특별히 공부하지 않더라도 어느 만큼은 자연스럽게 수양이 쌓아질 것이니 말이다. 옛 사람들은 그런 좋은 자리를 그냥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런 곳에 집을 지어 살고 가르쳤으니 그것이 ‘관선정(觀善亭)’이요 ‘상현서원(象賢書院)’이다.
상현서원은 1610년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았으니 소수서원에 이어 우리나라 서원의 두 번째가 된다. 상현서원은 1555년(명종 10) 당시 보은현감 성제원 선생이 삼년성 내에 충암 김정(金淨) 선생을 향사하기 위해 지어 '삼년성서원'이라 하였는데, 1610년에 '상현(象賢)'이라 사액을 받았다. 1672년(현종13) 삼년산성에서 지금의 위치인 외속리면 서원리로 옮겼고, 1681년에 대곡 성운(成運)과 보은현감을 지낸 동주 성제원(成悌元), 중봉 조헌(趙憲) 선생을, 1695년에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추가해 배향했으니 모두 다섯 분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공동체의 이상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강한 성품과 고매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역사는 그들을 선비라 하였다. 선비는 삼국시대 이후로 우리 역사에 이상의 깃발을 높이 올리고 구현하기 위하여 헌신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요 신념으로 삼았다. 선비란 평생 독서를 쉬지 않는 ‘독서인(讀書人)’이며, 독서를 통해 진리의 근원을 통찰하고 현실에 대한 대응방법을 발견해내는 '지성인(知性人)'이었던 것이다.
경제도 어렵고 나라도 어수선한 때 여름휴가를 가지 못했으면 가족·친지와 함께 구병리 '아름마을'에서 고즈넉이 하룻밤 보낸 다음, 이튿날 서원계곡을 따라 맑은 물과 오래된 나무, 거기에 어우러진 장승과 한옥, 그리고 우리가 숭모해야 할 푸른 선비 다섯 분의 정신까지 가슴에 담을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보은=황의택 기자 missman@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