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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 보석사의 ‘보석’ 전나무 길. 일주문서 대웅전까지 이어지는 이 길을 걸으면 근심은 사라지고 마음은 솜털처럼 가벼워진다. 이길은 영화배우 한석규가 걷는 장면의 광고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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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보석사로 가을을 마중 나갔다.
그런데 가을은 저만치서 쭈뼛쭈뼛거리고 있었다.
폭염·폭우·태풍으로 그 어느 해보다도 치열하게 이 땅을 뜨겁게 달구었던 올 여름은 마지막 기세를 뽐내며 쉽사리 가을에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보석사는 충남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에 위치한 마곡사의 말사로 금산의 진산인 진악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 헌강왕 때 조구대사에 의해 창건됐다고 전해지는데 보석사라는 사찰 이름은 이 사찰 앞산에서 금을 캐내 불상을 만들었다 해서 명명됐다고 전해진다.
보석사의 가을은 보석만큼이나 황홀한 풍경을 연출한다. 일주문에서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과 수령 1000여 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가을 색깔로 물들기 시작하면 이 세상 가을이 온통 보석사에만 내려앉지 않았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 선 보석사의 자태도 만만치 않았다.
한적한 도로를 따라가다 정겨운 시골 풍경이 펼치지는 보석사 초입에 들어서니 적막함이 먼저 나와 반긴다.
일주문으로 들어서니 전나무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아귀다툼같던 마음이 차분해진다.
대웅전까지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은 이 사찰의 백미다. 길 따라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나무들은 한결같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었다. 나뭇가지들은 마치 속세의 나쁜 기운이 근접하는 것을 차단하려는지 무성하게 자라 하늘만 간신히 보일 뿐이다. 언젠가 영화배우 한석규가 이 전나무 길을 걷는 장면의 광고가 방영돼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전나무 길로 들어서자 마자 바로 왼쪽에 영규대사의 충혼을 기리는 의병승장비가 서 있다. 영규대사가 이 사찰에 머물며 수도하던 의선각이 대웅전 앞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발발,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을 때 대사는 이 전나무 길을 걸으며 구국의 일념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고민의 밤을 지새우며 전나무 길을 서성거리는 대사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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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암 오르는 길목 꽃무리 |
마침내 결단을 내린 대사는 조헌 선생과 함께 의병을 결집시켜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금산 전투서 대사와 조헌 선생을 비롯한 700여 의병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장렬히 순절하였다. 그 기개가 올곧게 뻗은 전나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병승장비를 뒤로 하고 전나무 길을 걷고 있자니 갑자기 마음이 솜털처럼 가벼워진다. 머릿속에 가득했던 108번뇌도 전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에 취해 삼심육계 줄행랑을 쳤다. 200여m 정도 구름 위를 걷는듯한 기분으로 발은 내딛다 보니 전나무 길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렀다. 바로 그 곳에 수령 1000여 년의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나무를 처음 보는 순간 그 풍채에 압도당해 잠시 말을 잊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000년이라니 갑자기 인간사가 덧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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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넘은 은행나무 |
이 나무는 조구대사가 보석사를 창건할 당시 제자들과 함께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나라에 변고가 있거나 마을에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으면 하루 종일 울음소리를 내 마을을 지켰다 한다. 1년 365일 마을 걱정, 나라 걱정만 한 것을 안 것일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까, 이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65호로 지정돼 있다.
사찰 신도들은 매년 음력 2월 25일(경칩) 나무 앞에서 대신제를 지내며 무탈을 기원했으나 최근에는 음력 5월 5일 단오날에 치러진다 .
은행나무를 지나 오른쪽으로 발길을 돌려 대웅전으로 올라섰다. 아담한 규모가 마치 크기로만, 실적으로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세상을 깨우치려는 것 같았다. 신라시대 때 지어진 건물은 임진왜란때 소실되고 현 건물은 조선후기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대웅전 옆에는 영규대사 영정을 모신 진영각이 자리잡고 있다. 전각에 모셔진 영정을 쳐다보고 있자니, 독도 문제 등으로 얽히고 설킨 한일관계가 떠올랐다. 왠지 미안한 마음에 영정을 정면으로 쳐다보다 못했다. 임진왜란, 한일 강제합병. 위안부 문제 등 아직도 풀지못한 숙제에 대한 죄스러움이 밀려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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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석사 대웅전 |
대웅전 앞에는 영규 대사가 거처하던 의선각이 자리잡고 있는데 지금은 요사채로 쓰이고 있다.
대웅전을 지나쳐 진악산을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하니 영천암으로 가는 이정표와 진악산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 이정표가 나란히 서 있다. 산 정상까지는 왕복 4시간 거리다. 영천암 쪽으로 향했다. 왼편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마음을 비우라고, 모든 것을 내려 놓으라고, 그 것이 진정한 자유를 얻는 지름길이라고.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 때문이지 10여분 걷다보니 바로 영천암에 이르렀다. 보석사와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 암자의 이름은 암자 뒤 바위 굴에서 석간수가 흐르고 있는데 모든 병을 낫게 하는 영험한 물이었다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영험한 샘을 품고 있는 암자, 영천암이라 불려지게 됐단다. 지금도 바위 틈으로 샘물이 조금씩 새어 나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보석같은 사찰과 영험한 석간수가 흐르는 암자가 왠지 썩 잘 어울리는 조합같이 느껴졌다. 암자 앞마당에 서니 진악산 산자락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산자락 뒤편서 가을이 무안한듯 고개를 삐쭉 내밀고 있었다.
대전서 1시간 정도면 마주할 수 있는 보석같은 사찰, 마음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할 때 한 번씩 짬을 내 찾게되는 사찰, 만추에 다시 한 번 와야겠다고 되내며 발길을 되돌렸다.
마침 오늘부터 금산인삼축제가 성대하게 막을 올린다. 축제를 즐긴 후에 시간 내서 한 번 들러보시면 어떨는지….
글·사진=황천규 기자 hcg@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