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을 찾아서 Outside the box'란 주제로 열린 지구촌 공예축제인 2009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40일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1일 청주예술의전당에서 폐막식이 진행된 가운데 화려한 불꽃쇼가 피날레를 장식하고 있다. 이성희 기자 lsh77@cctoday.co.kr  
 
지구촌 공예축제인 ‘2009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40일간의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1일 청주예술의 전당 야외무대에서 열린 폐막식에는 남상우 청주시장과 고용길 청주시의회의장, 비엔날레 관계자, 운영요원, 도슨트, 자원봉사자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축하공연, 공식행사, 폐막선언, 불꽃쇼 등으로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남상우 청주시장은 폐회사를 통해 "이번 비엔날레는 청주가 직지의 창조정신을 계승하고 세계 공예문화산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며 "청주를 세계 공예문화의 중심 메카로 만들기 위해 상설관 건립 및 중장기 마스터플랜을 수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고용길 청주시의회의장은 "공예비엔날레 성공을 위해 헌신적으로 애써주신 자원봉사자 등 청주시민께 감사 드린다"며 "경험과 노하우를 자신감으로 삼아 미래지향적인 공예문화 창달과 국제무대에서 새로운 지평을 위해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 자리에서는 한국미술협회와 충북공예협동조합이 공예비엔날레의 성공적인 개최와 공예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남상우 시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올해로 제6회를 맞은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는 ‘만남을 찾아서’를 주제로 53개국에서 300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해 본전시, 공모전, 초대국가 캐나다, 국제공예페어, 생활공예프로젝트 등 공예미술의 향연을 벌였다. 특히 비엔날레 역사상 유례없이 특정 주제를 탈피, 파격적인 전시를 선보여 명실상부한 국제적인 공예비엔날레로 도약하고 있음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현숙 기자 leehs@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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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성백제의 왕성(王城)’과 건국 시조는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다. 사진은 그동안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꼽혔던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의 모습. 그러나 대부분 3~5세기 때의 유물로 밝혀졌고 왕궁이 있었다고 추정할 만한 대형 시설물의 흔적은 나오지 않고 있다. 김상용 기자 ksy21@cctoday.co.kr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의 역사는 기원전 18년부터 660년까지 678년간 지속됐다. 온조왕부터 의자왕까지 모두 31명의 왕이 다스렸다고 전한다. 이들이 거처한 도읍을 중심으로 백제사를 구분하면 다시 한성백제(기원전 18년~475년)와 웅진백제(475년~538년), 사비백제(538년~660년)로 나뉜다.

온조왕이 기반을 다지면서 서서히 마한세력을 병합시키고, 근초고왕(346년~375년)대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되지만 개로왕(455년~475년)대에 이르러 고구려에 패해 백제는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새로운 재기를 노린다.

무령왕(501년~523년)과 성왕(523년~554년)에 의해 백제는 다시 한 번 중흥을 맞게 되지만 신라에 발목 잡혀 사비(지금의 부여)까지 밀리게 된다.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600년~641년)에 의해 잠시 반짝했지만 의자왕(641년~660년)이 나·당연합군에 패하면서 백제의 역사는 문을 닫게 된다.

물론 줄기차게 백제부흥운동이 전개됐지만 이 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삼국시대 백제 이야기의 큰 골간이다. 그런데 백제 678년의 역사 중 500년 가량이 한성백제에서 쓰여졌는데 그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이 기간 대부분의 역사가 어떤 식으로든 끼워맞춰지고 왜곡되는 바람에 한성백제의 실체가 오락가락·오리무중이다.

   

△ 백제의 건국시조는 누구

삼국사기에 담긴 백제의 역사는 시작부터 꼬여있다. 우선 누구에 의해 건국됐는지부터가 명확하지 않다. 일단 삼국사기엔 백제건국설화와 관련해 온조설화와 비류설화 2가지가 소개돼 있다.

먼저 온조설화의 내용은 이렇다.

-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인데 그의 아버지는 추모 또는 주몽이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라하고 둘 째는 온조라했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됐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남하했다.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곳을 바라봤는데 비류는 해변에 살기를 원해 미추홀로 가 살았고 온조는 위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다. 이 때가 중국의 전한시대 성제가 왕위에 오른 홍가(鴻嘉) 3년이었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도 백제의 시조가 온조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엔 비류를 건국시조로 한 설화도 함께 기술돼 있다.

- ‘시조는 비류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북부여 왕 해부루(解夫婁)의 서손인 우태(優台)다. 어머니는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 소서노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라하고 둘째는 온조라했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과부로 살았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소서노를 왕비로 맞았다. 소서노는 주몽의 건국에 많은 도움을 줬고 그래서 주몽은 소서노와 두 아들을 잘 대해 줬다. 그런데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禮) 씨에게서 낳은 아들 유리가 왔고 그가 태자가 됐다. 그러자 비류는 어머니, 동생과 함께 패수와 대수를 건너 남하해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

삼국사기 백제 건국기록이 이렇게 엇갈리면서 아직까지 백제시조에 대한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비류설화에 주목하면서 소서노를 백제건국의 시조로 봤고 아예 다른 한 편에선 온조와 비류를 별개의 왕통으로 놓고 백제를 온조백제와 비류백제 두 계통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사기 이외엔 백제의 시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실한 유적·유물이나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면 백제의 시조와 관련한 정답은 영원히 기대할 수 없다.

   

△ 한성백제 왕궁은 어디에

‘한성백제의 왕성은 어디에 있었을까’하는 궁금증도 여전히 미궁에 빠진 풀리지 않은 숙제 중 하나다. 삼국사기엔 온조가 남하해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것으로 나온다. 북쪽엔 한수가 흐르고 동쪽엔 높은 산이 연이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는 곳이라고 설명돼 있다.

현재까지 천안(직산)과 서울, 하남시 등이 백체 초기 왕성의 입지로 압축됐지만 이 가운데 서울 한강 일대가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꼽히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몽촌토성(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이 백제 초기 왕성, 즉 하남위례성이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몇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몽촌토성에선 백제시대 주요 유구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대부분 3~5세기 때의 유물로 밝혀졌고 당시 몽촌토성 안에 왕궁이 있었다고 추정할 만한 대형 시설물의 흔적은 나오지 않고 있다. 왕성이 있기엔 성의 규모가 너무 협소하다는 의견이 있다.

   
▲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에 있는 우물터(사진 위)와 몽촌토성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 썩어가는 나무가 왠지 스산하다.

이런 와중에 1997년 몽촌토성에서 800여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풍납토성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풍납토성 안에 있던 아파트를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백제시대 유구와 유물이 출토돼 당시 백제인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출토 유물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기원전 2세기~기원후 3세기에 만들어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토성 축성 방식(판축기법)도 당시로선 혁명적인 기술이 도입된 것으로 백제의 수준높은 기술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풍납토성 또한 이곳에 백제의 왕성이 있었다라고 단정지을 만한 근거는 여전히 부족하다. 한강과 바로 접해있고 한강 건너 아차산에서 보면 풍납토성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이기 때문에 왕궁의 입지로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현재로선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왕성(왕궁)의 기능을 나눠가지면서 시대를 달리하며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란 시나리오에 무게가 실려 있다. 몽촌토성엔 왕이 상주하는 궁궐이, 풍납토성엔 별궁이나 이궁(離宮)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당시 왕족이나 권력핵심부의 무덤은 왕성 인근에 마련되는 경향이 있는 데 몽촌토성·풍납토성 인근에 있는 서울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가락동 백제고분군 등은 몽촌토성·풍납토성이 왕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글=이기준 기자 poison93@cctoday.co.kr

사진=김상용 기자 ksy21@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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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3분기 대전지역 오피스 빌딩의 공실률이 전국 대도시 중 가장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국토해양부가 발표한 전국 7대 도시 소재 오피스(500동) 및 매장용(1000동) 빌딩 공실률에 따르면 3분기 대전 오피스(28개) 빌딩 공실률은 2분기 대비 10.8%포인트 증가한 24%로 7대 도시 중 가장 높은 공실률을 보였다.

이는 대전 원도심에 입주했던 대전지방경찰청과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신청사로 이전한 데 따른 것이라고 국토부는 설명했다.

임대료는 ㎡당 평균 4300원으로 전 분기 대비 100원/㎡ 하락해 보합세를 보였다.

이처럼 공실률 증가와 임대수입 감소로 오피스 빌딩의 투자수익률도 떨어지고 있다.

대전 오피스 빌딩의 3분기 투자수익률은 0.36%로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투자수익률은 3개월간(지난 7~9월) 투자된 자본에 대한 수익률을 말한다.

임대료 등 빌딩 운영에 따른 소득수익률과 부동산가격 증감에 의한 자본수익률을 합산한 것이다.

매장용(49동) 빌딩 공실률은 13.8%로 울산(18.5%), 광주(17.5%), 인천(16.0%)에 이어 네번째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임대료는 전국 평균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을 보였다.

3분기 대전 매장용(1층 기준) 빌딩 평균 임대료는 ㎡당 2만 8500원으로 전국 평균4만 500원에 비해 아주 낮은 수준을 보였다.

대전 매장용 빌딩의 3분기 투자수익률은 0.79%로 조사돼 2분기보다 0.2%포인트 하향됐다.

박길수 기자 bluesky@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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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지역 청소년범죄가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일 충북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도내에서 검거된 청소년은 모두 3887명으로, 2007년(3261명)과 비교해 19.1%, 2006년(2853명)에 비해선 36.2%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형별로는 음주운전 등 특별법범이 1481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절도범 1198명, 폭력범 908명, 지능범(사기 등) 176명, 강력범(살인·강도 등) 86명 등의 순이다.

특히 강력범의 경우 지난 2006년 50명에서 올해는 86명으로 72%의 높은 증가율을 보였고, 폭력범 역시 745명에서 908명으로 21.9%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범행수법에 있어서도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후배의 몸을 담뱃불로 지지고, 가출 후 생활비를 마련하려 상습적으로 빈집을 터는 등 갈수록 대담해지고 있다.

최근 경찰에 붙잡힌 박모(18) 군 등 2명은 지난달 후배 A(15) 군을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 한 공원으로 끌고 가 담뱃불로 다리를 지지고 얼굴 등을 마구 폭행한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이 신청됐다. 이들은 경찰에서 "A 군이 평소에 말을 듣지 않아 혼을 내키려했다"고 진술했다.

가출해 여관에서 모여살던 이들은 생활비가 떨어지자 후배인 B(16) 군 집 출입문을 파손하고 침입해 보관 중이던 현금 등 50만 원 상당의 금품을 훔친 혐의도 받고 있다.

앞서 지난 22일에는 반말을 했다는 이유로 후배를 2시간 동안 끌고 다니며 집단으로 폭행한 유모(16) 군 등 14명이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청소년들의 성폭행범죄도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8월에는 청주의 한 고등학생이 아파트에서 귀가하는 5살 난 여아를 지하실로 데려가 성추행했고, 2월에는 청주에서 고등학생 1학년 3명이 중학교 시절 동급생을 12차례 성추행하고 폭행한 혐의로 형사 입건되기도 했다.

청소년범죄 담당 경찰관은 “해를 거듭할수록 청소년들의 범행수법이 흉폭하고 대담해지고 있다”며 “사회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청소년들의 일탈행위를 예방하기 위해선 사회적 제도마련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하성진 기자 seongjin98@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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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이 운다고 정부가 뭐 쳐다나봤나요?”

지난 주말 대전 인근에서 시설채소를 재배하는 이모(60) 씨는 기온이 내려갈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올해 애써 지은 벼농사를 쌀 값 대란으로 허무하게 망친 이 씨는 올 겨울 시설 오이라도 잘 키워보려 했지만 난방유 가격이 치솟으면서 부담이 커지고 있다.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지난 주말 난방용 면세유 가격은 1 ℓ에 746.50원으로 한 달 사이 ℓ당 77원이나 올랐다.

이 씨가 이달에 예상하는 사용량은 1만ℓ로, 11월 한 달 기름값으로만 77만 원을 더 지출해야 한다.

게다가 국제유가는 계속 오르고 있는 데다 아직 인상분이 덜 반영됐다는 소식은 앞으로 추가 지출이 더욱 늘어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이 씨는 “지난 주말 비가 온 이후로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예정보다 열흘 정도 일찍 난방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며 “본격적인 난방이 시작되는 이 때 기름값이 오르냐”고 하소연했다.

농민들은 기름값이 더 오르기전에 남은 면세유 배정량을 미리 앞당겨 사용하고 싶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다.

농협 관계자는 “이미 지난달부터 올해 잔량 요청이 빗발치고 있지만 각 조합별 배정량이 요구량에 비해 부족하다”고 말했다.

불과 3개월 앞의 농산물 가격도 예측하기 어려운 우리의 농촌 시스템을 고려할 때 농민들은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한다.

한창 채소가 무르익을 때 가격이 폭락하면 농민들은 난방을 끓어 키우던 것을 죽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손해를 보면서 계속 키우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진다.

이 씨는 “지금 키우는 오이가 얼마에 팔릴지, 다른 농가에서 얼마나 생산할지 모르기 때문에 겨울 농사는 늘 아슬아슬한 모험을 하는 셈”이라며 “그러나 면세유 공급은 매년 줄고, 수입 농산물은 늘어나는 등 농사짓는 조건은 갈수록 어려워진다”고 토로했다.

실제 농민들 가운데는 올 겨울 기름값 부담이 커지면서 농사 포기를 생각하는 농가가 적지 않다는 게 농민단체 관계자의 전언이다.

모 농민연합 회장은 “올해 풍년이라고 하지만 정부정책으로 인해 벼농사를 망친 농민들은 겨울농사 부담이 더욱 커진 상태”라며 “설상가상으로 면세유 가격도 오르면서 중간에라도 수지타산이 어려워지면 난방을 중단할 것이라는 농가가 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재형 기자

1800916@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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