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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백제의 왕성(王城)’과 건국 시조는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다. 사진은 그동안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꼽혔던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의 모습. 그러나 대부분 3~5세기 때의 유물로 밝혀졌고 왕궁이 있었다고 추정할 만한 대형 시설물의 흔적은 나오지 않고 있다. 김상용 기자 ksy21@cctoday.co.kr | ||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의 역사는 기원전 18년부터 660년까지 678년간 지속됐다. 온조왕부터 의자왕까지 모두 31명의 왕이 다스렸다고 전한다. 이들이 거처한 도읍을 중심으로 백제사를 구분하면 다시 한성백제(기원전 18년~475년)와 웅진백제(475년~538년), 사비백제(538년~660년)로 나뉜다.
온조왕이 기반을 다지면서 서서히 마한세력을 병합시키고, 근초고왕(346년~375년)대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되지만 개로왕(455년~475년)대에 이르러 고구려에 패해 백제는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새로운 재기를 노린다.
무령왕(501년~523년)과 성왕(523년~554년)에 의해 백제는 다시 한 번 중흥을 맞게 되지만 신라에 발목 잡혀 사비(지금의 부여)까지 밀리게 된다.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600년~641년)에 의해 잠시 반짝했지만 의자왕(641년~660년)이 나·당연합군에 패하면서 백제의 역사는 문을 닫게 된다.
물론 줄기차게 백제부흥운동이 전개됐지만 이 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삼국시대 백제 이야기의 큰 골간이다. 그런데 백제 678년의 역사 중 500년 가량이 한성백제에서 쓰여졌는데 그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이 기간 대부분의 역사가 어떤 식으로든 끼워맞춰지고 왜곡되는 바람에 한성백제의 실체가 오락가락·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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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건국시조는 누구
삼국사기에 담긴 백제의 역사는 시작부터 꼬여있다. 우선 누구에 의해 건국됐는지부터가 명확하지 않다. 일단 삼국사기엔 백제건국설화와 관련해 온조설화와 비류설화 2가지가 소개돼 있다.
먼저 온조설화의 내용은 이렇다.
-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인데 그의 아버지는 추모 또는 주몽이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라하고 둘 째는 온조라했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됐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남하했다.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곳을 바라봤는데 비류는 해변에 살기를 원해 미추홀로 가 살았고 온조는 위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다. 이 때가 중국의 전한시대 성제가 왕위에 오른 홍가(鴻嘉) 3년이었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도 백제의 시조가 온조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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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삼국사기엔 비류를 건국시조로 한 설화도 함께 기술돼 있다.
- ‘시조는 비류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북부여 왕 해부루(解夫婁)의 서손인 우태(優台)다. 어머니는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 소서노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라하고 둘째는 온조라했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과부로 살았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소서노를 왕비로 맞았다. 소서노는 주몽의 건국에 많은 도움을 줬고 그래서 주몽은 소서노와 두 아들을 잘 대해 줬다. 그런데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禮) 씨에게서 낳은 아들 유리가 왔고 그가 태자가 됐다. 그러자 비류는 어머니, 동생과 함께 패수와 대수를 건너 남하해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
삼국사기 백제 건국기록이 이렇게 엇갈리면서 아직까지 백제시조에 대한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비류설화에 주목하면서 소서노를 백제건국의 시조로 봤고 아예 다른 한 편에선 온조와 비류를 별개의 왕통으로 놓고 백제를 온조백제와 비류백제 두 계통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사기 이외엔 백제의 시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실한 유적·유물이나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면 백제의 시조와 관련한 정답은 영원히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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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백제 왕궁은 어디에
‘한성백제의 왕성은 어디에 있었을까’하는 궁금증도 여전히 미궁에 빠진 풀리지 않은 숙제 중 하나다. 삼국사기엔 온조가 남하해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것으로 나온다. 북쪽엔 한수가 흐르고 동쪽엔 높은 산이 연이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는 곳이라고 설명돼 있다.
현재까지 천안(직산)과 서울, 하남시 등이 백체 초기 왕성의 입지로 압축됐지만 이 가운데 서울 한강 일대가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꼽히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몽촌토성(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이 백제 초기 왕성, 즉 하남위례성이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몇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몽촌토성에선 백제시대 주요 유구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대부분 3~5세기 때의 유물로 밝혀졌고 당시 몽촌토성 안에 왕궁이 있었다고 추정할 만한 대형 시설물의 흔적은 나오지 않고 있다. 왕성이 있기엔 성의 규모가 너무 협소하다는 의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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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에 있는 우물터(사진 위)와 몽촌토성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 썩어가는 나무가 왠지 스산하다. |
이런 와중에 1997년 몽촌토성에서 800여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풍납토성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풍납토성 안에 있던 아파트를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백제시대 유구와 유물이 출토돼 당시 백제인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출토 유물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기원전 2세기~기원후 3세기에 만들어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토성 축성 방식(판축기법)도 당시로선 혁명적인 기술이 도입된 것으로 백제의 수준높은 기술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풍납토성 또한 이곳에 백제의 왕성이 있었다라고 단정지을 만한 근거는 여전히 부족하다. 한강과 바로 접해있고 한강 건너 아차산에서 보면 풍납토성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이기 때문에 왕궁의 입지로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현재로선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왕성(왕궁)의 기능을 나눠가지면서 시대를 달리하며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란 시나리오에 무게가 실려 있다. 몽촌토성엔 왕이 상주하는 궁궐이, 풍납토성엔 별궁이나 이궁(離宮)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당시 왕족이나 권력핵심부의 무덤은 왕성 인근에 마련되는 경향이 있는 데 몽촌토성·풍납토성 인근에 있는 서울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가락동 백제고분군 등은 몽촌토성·풍납토성이 왕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글=이기준 기자 poison93@cctoday.co.kr
사진=김상용 기자 ksy21@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