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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02 고목에서 자라는 어린나무.... 불쌍타
  2. 2008.11.02 홋카이도 새벽 5시40분 아침... 2
  3. 2008.10.31 노래하는 얄개들
  4. 2008.10.31 반세기의 우정展
  5. 2008.10.31 대전미술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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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전 근현대사 건축물 활용 방안을 찾기 위해 일본을 찾았다. 목적지는 도쿄와 요코하마, 그리고 홋카이도. 일본의 근현대사 건축물들의 역사를 짧은 일정 안에 최대한 담아 낼 수 있도록 꼼꼼하게 일정을 짰다. 사진은 마지막 날 찍은 홋카이도 도심의 모습. 마지막 날 밤 11시에 호텔에 들어서서 늦은 잠을 청했지만 아쉬웠던 탓인지 새벽 5시40분에 눈이 떠졌다. 새벽 어스름에 보이는 홋가이도 도심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정적에 쌓인 조용한 도심이 왠지 대구를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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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식인지는 모르지만 꽤 오래 된 듯한 캐딜락이 도심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화려한 핑크 톤과 유구한 역사를 무색케 할만큼 잘 관리되어 있는 외관이 주인에게 얼마나 소중한 애마인지를 미루어 집작케 한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좋으면 모든 것을 올인하는 마니아적 기질이 물씬 묻어나는 일본 동경의 거리를 대변하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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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진과 가죽 의상, 선명한 구렛나루, 베컴도 울고 갈 닭 벼슬머리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한 껏 드러내고 있는 거리의 댄서들...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전문적인 댄서들이라고 하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있는 제법 연배도 있어 보이시는 분들이 음악에 맞춰 자신들의 군무를 선보이고 있다. 남보다 특별한 실력이 아니면 남들 앞에 나서길 꺼려하는 우리의 문화와는 달리(아님, 나만 그런가?) 대중의 시선 자체를 즐기는 듯한 그들의 모습이 이국의 땅에 왔음을 실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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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행위 예술가 - 캔버스에 멋지게 자화상을 그린 후 그 그림에 마구 선을 그어가며 행위 예술을 하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이 거리의 자유로운 예술 혼을 대변해 주는 듯 시원하게 느껴졌다. 별도의 장치가 없어도 그들이 서 있는 그 곳이 바로 무대가 되는 젊음의 무한 에너지가 넘쳐나는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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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껏 멋을 부린 일본인들 사이에서 자체 발광하고 있는 나!
게으름 떨지 않고 한국 꽃미남의 실태를 널리 알리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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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모습으로 '프리 허그'의 정신을 외치고 있는 사람들.
'프리 허그'를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세계 어디를 가도 친근하기만 하다.
나도 '프리 허그' 정신에 입각해 흰 털모자의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었으나, 늘 그렇듯 용기 부족에, 멍석 깔아줘도 어찌하지 못하는 심한 낯가림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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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아무런 편견 없이 덥썩 안는 이들의 모습이, 나같이 뒤에서 호박씨나 까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맑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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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는 맛있어 보이는 간식.
아마도 타코야키 종류 같은데 가다랭이 포가 꿈틀대고 있지 않는 걸로 봐서는 속의 앙꾸가 다른 것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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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배도 꽤 있어 보이는 분들이 나름 모여 정모를 즐기는 듯한 모습이다.
약간 어줍지만 그래도 나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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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락밴드.
여성 보컬의 힘찬 샤우팅과 역시 여성 드럼 주자의 빠른  비트가 거리의 활기를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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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무대 전문 연주자의 필이 나는 이 아저씨의 노래는, 돈 없이도 모든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이 거리의 장점을 다 말해주고 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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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런 거리에 빠져서는 안돼는 것이 길거리의 포차 문화다.
빨간색 천으로 씌워져 있는 거리의 포차에서 일색이 듬뿍 묻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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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캐릭을 코스튬 플레이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본의 색깔이 물씬 묻어나는 이 아가씨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외국인이 상당수다. 자세히 보면 눈에도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한 렌즈를 꼈는데 그 모습이 제법 무섭다. 이 아가씨의 열정에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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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테니스라고 해야하나 아님 탁구를 탁구공 대신 정구공으로 치고 있다고 해야하나 싶은, 캐치볼 비슷한 놀이를 많은 이들이 즐기고 있다.
야외에 나와서 부담없이 즐기는 이런 작은 놀이들이 건강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 같아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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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 자잔~ 일본에서 처음 먹어본 '츠유 라멘'. 육수에 간장으로 간을 한 라면 같았는데 면이 지나친 생면이어서 내 입맛에는 잘 안 맞았다. 튀긴 면발이 아닌 생면이어서라기 보다, 면발 자체가 너무 안익은 듯한 압박감이... OTL 그리고 함께 나온 밥에는 덮밥 문화가 발달한 일본답게 치킨 2조각이 올려져 있었는데 김치는 고사하고라도 단무지라도 줘야 어떻게 먹을텐데, 달랑 이것만 주니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 바라는 것들을 뒤로하고 그냥 과묵하게 조용히 주는대로 먹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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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라면 도전기 '돈코츠 라멘' 일본 라면은 된장으로 육수를 내는 '미소 라멘'과 간장 으로 맛을 내는 '츠유 라멘' 소금으로 간을 하는 '시오 라멘' 특히 돼지뼈와 닭뼈를 이용해 육수를 내는 큐슈계 라면이 맛있다는 소리를 듣고 갔는데, 기대에 차 도전한 돼지뼈 라면은 말 그대로 느끼가 그릇 한가득 묻어 있었다. 일본 유학생들 말이 처음에는 느끼하게 느껴지는 돼지뼈와 달뼈 국물이 자주 먹다보면 어느샌가 맛있게 느껴 진다는데, 난 여러번 도전해 볼 기회가 없어서인지 그저 칼큼한 국물 맛의 우리 인스턴트 라면이 그리웠다. 앞으로도 그닷 도전해 보고 싶은 영역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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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리는 일본어가 빚어 낸 비극의 산물... OTL 긴 설명이 없어도 다들 맘을 이해 하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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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란 자기 그릇에 나름 먹음직스럽게 나온 초밥. 한접시에 천엔이었는데(지금 환율로는 1만3000원정도) 그나마 지출 대비 가장 돈이 안 아까운 식사였지 않았나 싶다. 이정도 초밥을 먹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서도 그 정도의 값을 지불해야하니 일본에서 가장 저렴한 식사는 어찌보면 초밥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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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밥과 함께 곁들여 먹으라고 나온 미소(된장)국. 두루미 약 올리려고 대접하는 것도 아닌데 국 그릇이 너무 넓게 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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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지막날 찾은 한식집. 이 한식집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까발리자면, 한식집이라는 간판이 무색하게 3명이서 정확하게 3인분의 음식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깍두기를 달랑 2개만 갖다주는 만행을 저지르는게 아닌가! 이런 행태는 멀리 보자면 한국인의 따뜻한 인심을 깍아내리는 지양되어야할 행위로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울분을 표출, 깍두기 그릇을 주인에게 들고가 '인분에 맞게 깍두기를 하나 더 달라'고 요청, 받아오고 싶은 마음 굴뚝이었으나, 늘 그렇듯 속으로만 울분을 삼키고 마는 비겁함을 외국에 나온 민간 사절로써 한국인의 '젠틀함'을 만방에 떨쳐야 한다는 자기 포장의 논리를 위안삼아 조용히 한쪽에 찌그러져 식사를 마쳤다. 그런데 지금와서 새삼 이 사진을 보고 있자니 과묵하고 못난 내 자신이 부끄럽고 또 부끄럽기만 하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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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 중 정겨운 제육 덮밥이 있어 시켰더니 역시나 기대를 저 버리지 않고, 분식집에서나 나올 듯한 이런 식사가 나왔다. 쌀 한톨도 얼마나 소중한데 감사히 먹어야지... 암! 글쿠 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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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 두기 하나도 돈을 내야 먹을 수 있는 자로 잰듯한 인심에 열받아, 파전 하나 추가시켰더니 이런 파전이 나왔다... 당체 파전의 파는 어디에 있더란 말이냐... 이건 어디까지나 밀가루 전이지 이 어찌 파전이란 이름으로 고객들을 현혹할 수 있는지, 접시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밀가루 전에게 그 죄를 묻고 싶었다. 아마도 매운것을 잘 못 먹는 일본인의 입맛에 맞추다보니 이런 국적 불며의 파전이 탄생하지 않았나 싶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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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얄개들

2008. 10. 31. 10:55 from 사는이야기

빨리 크기를 소망했다. 어른이 되고 싶었다. 소년이 싫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처마 밑 대들보에 금까지 그어가며 키를 쟀다. 콩나물시루처럼 아침이면 부쩍 커있는 나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자라지 않았다. 사춘기는 아프기만 할뿐이었다. 목소리는 변성기를 앓고 가슴은 부질없는 속앓이를 했다. 무서웠다. 꿈조차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공부를 멀리 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눈을 팔게 되었다. 다름 아닌 딴따라. 친구들과 <좋은 친구들>이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나는 기타 치는 재주가 없어 부득불 드럼을 맡았다. rock~&~roll.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우린 벽촌으로 숨어들어 연습을 시작했다. 제천 두학면 자작리라는 곳인데 퍼스트 기타 겸 보컬을 맡은 친구가 그곳에 살았다. 비포장도로를 한없이 달려 종점에 다다르면 버스 돌릴 공터도 없는 깡촌(강촌)이었다. 그곳에 모인 네 명의 친구는 기타 두 명, 베이시스트, 드럼으로 나뉘어 밤낮으로 연습했다. 버스 종점은 사람을 그리움에 사무치게 하는 습성이 있다. 출발점을 종점으로 하고 종점을 출발점 삼는 버스를 보며 인생이 뭔가하는 감상에 젖는다.

드럼은 용돈을 모아 중고로 구입했다. 주로 연습한 곡은 ‘건아들'의 ’젊은 미소‘였다. 당시 젊은 미소를 완주(完奏)하면 다른 곡들도 쉽게 연주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 들국화(전인권), 부활(이승철) 등의 곡도 주된 연습곡이었다. 우린 네오나치 패거리들이 선호하는 스킨헤드를 하고는 날마다 쿵쿵따다~쿵쿵따다 했다. 물론 악보 보는 법을 잘 몰라 드럼의 경우 카세트 음악을 들으면서 음계를 카피했다. 들으면서 카피하면 청음능력도 좋아지고 각 파트의 소리의 차이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악보를 볼 줄도 쓸 줄도 모른다"고 말한 mr.Big의 빌리시안의 말처럼).

림숏, 하이햇 오픈-클로스 같은 기본적인 주법은 대강 교본을 보고 기본적인 레퍼토리를 구성하고 나머지는 대강대강 때렸다. 스네어 드럼(snare Drum)과 하이-헷 심벌(Hi-Hat-cymbal)을 기본으로 치고 크래쉬 심벌(Crash Cymbal), 스몰 탐탐(Small Tom Tom), 라지탐탐(Large Tom Tom), 라이드 심벌(Ride cymbal)등을 기각기 한다. 기각기는 스네어-스몰탐탐-라지 탐탐을 2연음이든지 3연음, 혹은 4연음 등을 리듬, 박자에 맞추어 차례로 돌려치는 것을 말한다. 하이햇이 8비트라면 각기는 16비트로 돌리면 된다. 쿵 딱 쿵 딱 두구두구 두구두구 두구두구 두구두구 챙~, 쿵딱은 킥과 스네어이고 두구두구는 스네어-스몰탐-라지탐-플로어탐을 말한다. 각기를 부드럽게 돌리려면 드럼의 고무판을 제대로 맞춰야 한다. 베이스 드럼(Base Drum)은 큰 북처럼 생긴 것으로 발로 꾹꾹 밟는다. 그런데 손과 발이 따로 놀아야 한다는 게 제일 고역이었다. 스네어드럼은 왼손, 하이-헷 심벌은 오른손, 오른 발로는 베이스드럼을 밟는데 박자에 따라 손발이 낑낑댔다. 엇박자였다.

친구의 집은 가난했다. 때문에 삼시(三時) 세끼가 문제였다. 밥은 있는데 반찬이 없었다. 그렇다고 젊은것들이 모여 공부는 안하고 미친 년 꽹과리 치듯이 놀고 있으니 반찬이 좋을 리 없었다. 1식1찬, 밥과 고추가 전부였다. 청양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는 게 유일했다. 청춘의 매콤한 반찬, 그래도 젊어서인지 눈물 콧물 다 빼며 맛나게 먹었다.

연습한지 두 달이 넘었을 즈음 초등학교 분교 운동장에서 첫 공연을 했다. 교단에 악기를 설치하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홍보를 했다. 심지어는 이장께서 마이크 방송까지 해주었다. 오후6시에 시작한 공연은 단 40분 만에 막을 내렸다. 관객이 30여명에 불과한 것도 맥 빠지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공연 자체가 엉망진창이었다. 화음은 둘째 치고 저마다 잘났다고 따로 놀았다. 곡이 맞을 리 없었다. ‘젊은 미소’ 한 곡이 끝나자 관객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드럼을 치다가 스틱이 날라 가는 사고도 있었다. 악사가 연장을 놓치다니. 완전한 실패였다. 연습이 짧았다는 자위(自慰)는 하나마나였다.

40분 만에 막을 내린 얄개들의 첫 공연은 결국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그후 드럼을 택시에 싣고 운반하는 도중 사람만 내리고 드럼은 놔두고 내렸다. 멍청한 드럼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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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의 우정展

2008. 10. 31. 10:53 from 문화 & in


http://art.cctoday.co.kr/bbs/view.html?boardCode=culture&category=&no=1581&page=1&search=

반세기의 우정展 <루불동인전>

유희영 | 이종상 | 김인중 | 이철주

미술에 대한 열정과 꿈으로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동거동락한 충남 출신 화가 4인이 한 자리에서 전시회를 연다.

오는 5일부터 내달 말까지 대전 아트센터 알트에서 열리는 '반세기의 우정전'은 각자의 영역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며 확고한 입지를 다져온 유희영, 이종상, 김인중, 이철주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들은 고교 시절 서양화가 김철호가 이끄는 미술반에서 함께 활동하며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가기 시작, 주목받는 화가로 성장했다.

부여에서 태어난 유희영은 지난 1991년 서울 갤러리현대에서의 전시를 시작으로 파리, 뉴욕 등을 오가며 개인전을 여는 등 국내·외에서 작품 활동을 했왔고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이화여대 명예교수로 일하고 있다.

'원형상' '독도' 등이 대표작인 이종상은 예산 출신으로 서울대 교수 및 박물관장, 미술관 초대관장, 서울대 명예교수, 상명대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천주교 신부인 김인중은 부여가 고향으로 파리와 도쿄, 벨기에 등에서 작품전시화를 연 바 있고, 지난 2006년 옥조근정 훈장을 수훈한 바 있는 이철주는 청양 출신으로 현재 중앙대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시 관계자는 "이번 전시회는 네 작가가 각자의 영역에서 이룬 확고한 작품세계와 성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의 042-221-0520

 김항룡 기자 prime@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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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미술 1970

2008. 10. 31. 10:52 from 문화 & in


*본 대전미술 1950은 대전 시립미술관 전시인 대전미술 하나전을 자료로 만들었으며
당시 활동이 활발했던 작가를 중심으로 했으나 작가의 사정 상 그 당시의 것이 아닌 작품을 출품한 작가도 있음을 밝힘니다*

대전미술 하나전

1970년은 대전미술이 급격히 넓어진 시기라고할 수 있다.
1971년 충청남도 미술대전이 개최되어 국전에서 소외되었던
충남 작가들이 화단에 많이 등장하게되었고
1973년 목원대, 한남대에 순수미술학과가 생기면서
충남에서 나고자란 작가들을 키워낼 수 있게되었다.
또한 화랑이 많이 생겨나 많아진 미술인들을 수용하게되었고
미술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미술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동호회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미술인구를 늘리는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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