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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안경점이 입주해 있는 대전시 동구 중동의 구 산업은행 대전지점(대전시 등록 문화재 19호) 건물이 요란한 간판과 현수막으로 뒤덮여 있다. |
오늘날 행정구역상의 대전은 100여 년 전에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빛바랜 대전지역 근현대사 건축물 진단
②잃어버린 역사의 대변인들
③위기의 충남도청사
④국외 근현대사 건축물 활용 실태
<원형 복원사례, 이축 보존 사례 중심>
⑤국외 근현대사 문화유적 활용 실태
<개수보존 사례 중심>
⑥근현대사 건축물 활용을 위한 고민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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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大田)이라는 말을 풀어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100여 년 전의 대전은 그저 '큰 밭(한밭)'에 불과했다. 일제의
지배·수탈정책에 따라 대전지역에 1905년 철도가 들어서면서 대전이라는 도시의 틀이 마련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대전의 근현대사가
시작됐다. 아직도 대전지역 곳곳에는 그 당시에 지어진 건물들이 찌그러지고 부서진 채로 남아 역사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다.
◆버려진 수탈의 역사 = 대전역에서 인동 방향으로 20여 분을 걷다보면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을 만나게 된다. 80여 년 전 이 건물의 정문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이하 동척 대전지점)'이라는 간판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으리라.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수탈기관으로 순박한 조선의 농부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소작농으로 전락시킨 동척 대전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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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시 동구 인동에 위치한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대전시 등록 문화재 98호) 건물. 서슬 퍼렀던 일제강점기 대표 수탈기관으로서의 위용은 온데 간데 없고 낡고 큰 간판 등으로 흉물스럽게 변한 지 오래다. |
하지만 모진 세월과 땅을 빼앗겨 버린 농민들의 설움이 남아선지는 몰라도 오늘날 이렇게 만난 동척 대전지점 건물은 초라하고 옹색해 보였다.
겉모습은 세월의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놓은 듯 덕지덕지 낡고 작은 간판이 난잡하게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이 건물이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라는 사실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대전시 등에 따르면 동척 대전지점은 1921년 벽돌을 쌓고 시멘트 기와를 얹은 2층 구조로 세워졌다. 누가
건축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형태적으로 벽돌과 화강암의 반복적 장식요소를 사용한 제국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동척 건물은 해방 후 체신청과 대전전신전화국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개인에게 매도되면서 상업시설로 쓰였다. 이 때문에 원형은 심하게 변형되고 훼손된 상태다.
동척의 서슬 시퍼런 위상을 말해주던 중앙 출입구는 1층 건자재상 매장으로 사용되면서 사라졌다. 대신 건물주인의 편의를 도모한
탓인지 건물 측면에 2층으로 올라가는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지만, 아무렇게나 뚫어놓다보니 빛 한 줌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어렵사리
계단을 더듬으며 올라간 2층 복도는 합판 위에 페인트와 벽지로 마무리한 촌스러운 내부 장식에 내부 원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동척 대전지점의 당시 위엄은 2층 지붕 위에 반원형의 캐노피(노대)가 지키고 있었다.
또 2층 부분 및 지붕부의 양식과 천장의 석고플라스터를 사용한 깔끔한 몰딩, 캐노피를 중심으로 정면 좌우 대칭을 이룬 균형미 등에서 한 때 대전의 경제를 주도하던 이름난 건축이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김민수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는 한 신문에서 "대전 동척건물을 보고 있노라면 대전의 역사의식 부재에 한숨만 나올 뿐"이라고 말했다.
동척 대전지점 건물과의 어설픈 만남을 뒤로 하고 발길을 중동으로 돌렸다. 동척 대전지점 건물과 함께 일제의 대표적인 경제수탈 기구였던 '구 산업은행 대전지점(대전시 등록문화재 19호)'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 건물은 원래 '조선식산은행' 대전지점을 증축해 1937년에 준공되었다. 철근 콘크리트로 하부는 화강석, 상부는 타일과 테라코타로 마감한 르네상스풍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만주에서 가져온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았고, 그 위에 화강석 타일과 테라코타를 사용해 마감했으며, 전후면과 양측 상부의 가장자리와 기둥에 테라코타로 꽃장식이 되어있다.
영업장 내부는 13m 층고의 단층으로 천장부는 철판으로 마감하고, 석고를 입힌 변형된 궁륭형이며 네 벽면의 중간 높이에는 벽에서
돌출된 발코니형 난간이 있다. 층고는 1989년 개축하면서 높은 영업장을 2개 층으로 나눠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건축당시 외벽에 사용된 'Butal(부탈)'사의 나무줄기문양의 장식용 테라코다와 3겹 8층의 아스팔트 방수, 두터운 신더
콘크리트 및 방수턱, 옥상걸이쇠 등은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여기까지가 대전시가 2003년에 발간한 '근대문화유산 목록화
조사보고서'의 내용이다.
구 산업은행 대전지점(이하 산은 대전지점)은 현재 안경점이 입주해 있었다. 첫 인상은 우스꽝스러웠다.
화강석으로 몸을 두른 르네상스식 외벽 위에는 안경점의 요란한 간판이 도배되다시피 걸려있었다. 북향으로 지어진 건물의 특성상
가능한 많은 빛을 끌어들이기 위해 크게 만들어졌다는 창문은 통째로 사라지고 그 자리는 각종 홍보 문구와 사진으로 채워져 있었다.
내부 역시 화려한 인테리어와 요란한 조명으로 건물 원형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기둥의 테라코타 꽃장식이나 멋스러운 나무줄기 문양의 장식용 테라코다 등이 생뚱맞아 보였다. 이렇게 방치하면서 대전시는 왜 이 건물을 왜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는지 의아심이 들었다.
◆다시 살아난 근현대사 건물 = 버림받다시피 방치되어 있는 동척 대전지점과 산은
대전지점의 씁쓸한 모습을 보며, 이번에는 중구 은행동에 있는 구 국립농산물 풀질관리원 충청지원(이하 품질원 충청지원·대전시
등록문화재 100호)을 찾았다. 이 건물은 근대문화유산 활용에 대한 좋은 선례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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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치된 채 쇠락하고 있는 근대건축물들과 달리 구 국립농산물 품질관리원 충청지원(대전시등록문화재 100호)은 리모델링을 통해 창작센터로 새롭게 재탄생, 근대건축물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주고 있다. |
품질원 충청지원은 1958년에 2층 규모로 지어졌다. 대전의 1세대 건축가인 배한구 씨가 설계했고 일성건설㈜ 임헌화 씨가 시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도심의 주요도로에 위치해 있는 공공업무용 건물로 만들었지만, 모양새는 자그마한 마당을 지나 만나는 아치형 현관과 도드라지지 않는 선적 처리로 일반 주택과 어울리도록 되어 있어 당시로서는 새로운 양식의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40여 년을 품질원 충청지원으로 쓰이던 이 건물은 1999년 충청지원이 이전하면서 계속 비워져 있었다. 품질원 충청지원
역시 다른 근현대사 건물과 같이 역사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거나 눈치껏 명맥이나 보존할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하지만 2005년
품질원 충청지원에 새로운 숨결이 불어 넣어졌다.
대전시에서 추진한 열린미술관 프로젝트와의 만남이 시발점이었다. 도시 곳곳에 위치한 근대 건축물을 활용해 문화의 공간으로 재활용해 보자는 계획에 품질원 충청지원이 포함됐다.
이 때부터 품질원 충청지원은 리모델링을 통해 창작센터로 탈바꿈했다. 건물의 외형은 최대한 살리는 한편 공간의 재배치를 통해
쓰임새를 높였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품질원 충청지원 건물은 전시실과 지역작가들의 창작공간으로 채워진 '열린미술관'이라는
이름을 갖고 재탄생했다.
안준호 대전시 학예연구사는 "대부분의 근대문화유산이 경제 논리에 의해 철거나 훼손되어 왔다"며 "품질원 충청지원의 경우
열린미술관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근대문화유산 건축물에 대한 보존과 활용에 대한 한가지 대안을 던져 준 셈"이라고 말했다.
글=이선우 기자 swlyk@cctoday.co.kr
사진=신현종 기자 shj000@cctoday.co.kr
본 시리즈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