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청원 통합 찬성 유인물 무단수거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이 청원군 유인물 수거 지시내용 공문을 확보한 가운데 최근 경찰조사에 소환된 공무원들 중 일부가 상부의 지시 등 혐의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전해져 수사에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이에 따라 통합에 따른 관권개입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있는 군수 등 윗선 관리자의 소환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청주흥덕경찰서는 최근 청원군 모 과장과 유인물을 훼손한 공무원들, 면장, 부면장 등을 소환해 공문 등을 보여주며 유인물 수거를 지시했거나 개입했는지 여부 등에 대해 조사를 벌여 이들 중 일부가 윗선의 지시가 있었음을 시인한 것을 밝혀내고 지난 6일 이들 중 1명을 재소환해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재소환 된 A 씨는 경찰조사에서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까지 군수 등 윗선 관리자에 대한 정확한 소환계획은 없지만 이미 소환된 일부 공무원이 통합문제와 관련해 군이 지시한 사실을 시인했다”며 “군의 관련부서 공무원을 소환조사하는 과정에서 군수 등 윗선의 지시한 것이 드러날 경우 달라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법률검토를 거쳐 혐의점이 드러난 공무원은 직권남용과 업무방해 혐의로 입건할 예정이다.

고형석 기자 kohs@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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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부여에선 현재 백제역사재현단지 건립 공사가 마무리 단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1700여년 전 근초고왕이 가졌던 원대한 꿈의 크기가 반영돼 있다. (사진은 백제역사재현단지 내 왕궁사찰 모습)  
 
4세기, 즉 서기 300년대는 동아시아(한국·중국·일본)의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근초고왕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한반도 중원에서 태동하면서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질서에 변화가 생겼다.

당시 중국 대륙은 남북조로 분열되는 혼란기로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중국 대륙, 북방 유목민과 국경을 접하면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던 고구려 입장에선 한 숨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볼 수 있다.

대륙의 분열로 한반도 북쪽의 긴장관계가 완화된 상황에서 고구려는 자연스럽게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준비절차에 착수하게 된다.

바로 언제라도 고구려의 뒤를 노릴 수 있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세력권에 포함시키는 일이었다.

◆완충지역이 사라지다

4세기 초, 한반도엔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가 저마다의 세력권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 고구려와 백제 사이엔 낙랑군과 대방군이라는 중국 본토의 직접지배를 받는 세력이 꾸준히 존재해 왔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끼여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중국 본토의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하나의 거점 역할을 했다.

그런데 4세기 초, 대륙의 분열로 낙랑군과 대방군의 입지가 약화되면서 고구려의 표적이 돼 버렸다.

고구려 입장에선 어차피 대륙과의 관계가 끊어질 운명이라면 백제의 세력권에 편입되기 전에 먼저 도모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당시 고구려 미천왕은 311년 서안평을 점령해 낙랑군과 대방군의 보급로를 차단한 뒤 곧바로 북쪽 전선을 뒤로 하고 남하해 서기 313년과 314년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차례로 접수했다.

긴장관계의 완충지역이 사라지고 고구려와 백제가 처음으로 세력권을 맞대는 순간이었다.

◆운명적 맞수의 조우

한강유역을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해 온 백제는 3세기 후반, 마한연맹체를 주도했던 목지국(천안 추정)을 세력권에 넣었고 근초고왕 즉위 이후 지속적으로 세력권을 넓혀 지금의 전라도 일대에 남아있던 마한의 잔존 세력과 경상도 남부 일대 가야세력을 차례로 세력권에 포함시켰다.

힘의 우열관계 속에서 무력으로 점령했다기 보다 서로 인정하는 선에서 동맹관계를 맺게 됐다고 볼 수도 있다.

백제의 영토와 영산산 유역 등지에서 발견되는 금동관모는 이 시기 백제가 복속한 영역의 수장에게 하사해 간접적으로 그 지역을 세력권에 넣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중국의 선진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여 새롭게 백제의 것으로 승화시켜 온 백제는 배후에서의 도발 걱정 없이 북쪽만을 염두에 둘 수 있었다.

근초고왕의 세력 확장은 즉위 3년부터 20년 사이에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엔 근초고왕 관련 기사가 즉위 2년에서 바로 21년으로 건너뛰기 때문에 일본 서기에 나타난 기사를 통해 유추 해석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일본 서기엔 백제의 요청으로 일본이 군대를 파견해 가야세력과 마한 잔존세력을 점령한 뒤 백제에 줬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정황상 믿긴 어렵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긴장관계의 정적을 깬 것은 고구려였다.

숙적이었던 전연(前燕)이 전진(前秦)에 의해 망하는 흐름이 감지되자 고구려는 옛 낙랑·대방군지역까지 내려와 치양성(황해도 배천 추정)을 공략했다.

369년, 백제와 고구려가 국가의 존망을 건 운명적 한 판 승부를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백제…한반도의 패권을 쥐다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남하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태자(훗날 근구수왕)를 보내 응수했다.

첫 대면에선 백제가 승리해 예성강 상류 수곡성(황해도 신계 추정)까지 고구려를 쫓아 올라가 세력권을 넓혔다.

기세가 오른 근초고왕은 2년 뒤 태자와 3만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 남진의 전진기지였던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은 날아온 화살 맞아 전사하고 만다.

한반도의 패권을 백제가 틀어쥐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백제의 세력권은 북으로는 대체로 배천~신계를 잇는 예성강유역, 남으로는 전남 해안에 이르는 한반도 서부지역을 확보하고 소백산맥 넘어 낙동강유역의 가야에도 세력을 뻗치게 됐다.

백제는 이 무렵이 정복국가로서의 절정기였다고 볼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큰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새로운 영역을 확보하면 이를 기념해 열병식을 거행하기도 했는데 왕이 군통수권을 확인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근초고왕은 고구려와의 첫 대면이었던 치양성전투에서 승리한 뒤 열병식을 거행했다.

삼국사기는 당시 상황을 ‘근초고왕 24년 11월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대열했는데 깃발은 모두 황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대륙의 황제, 즉 최고 권위를 상징했던 황색을 사용했다는 얘기다.

이것은 백제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뒤 한반도를 호령한 명실상부한 황제의 나라가 됐음을 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같은 해석이 지나칠 수도 있지만 건국 이래 최대의 세력권을 확보한 백제의 입장을 미뤄 짐작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삼국사기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수도를 한산으로 옮겼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한성백제의 왕성이 묘연한 상황에서 이 기사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백제-왜 선진문물 교역동맹

4세기 중반, 고구려와 백제의 패권다툼에서 왜(일본)는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당시 국가의 세력권은 곧 중국 대륙의 선진문물을 받느냐 못 받느냐와 비례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경우 대방군과의 우호관계 속에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가 대체로 쉬웠던 반면 일본은 지형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전제가 인정된다면 일본은 마찰을 빚어온 고구려-신라 보다는 백제에 의존하는 것이 필연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중국 선진문물 교역의 한반도내 거점은 백제에 편중될 수밖에 없었고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일본은 백제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지 않았을까.

더욱이 가야세력까지 백제권에 편입된 마당에 일본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칠지도의 비밀

백제의 절정기를 이룩한 근초고왕대는 영토의 확장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면에서도 주목할 일들이 일어났다.

왜(일본)와 교역의 물꼬를 트는 한편 중국 남경에 자리잡은 동진에 사신을 파견(372)해 백제로서는 중국과의 직접적인 국교에 첫 기록을 남겼다.

이전까진 중국 대륙과의 교류에서 백제는 마한의 한 소국가로 인식됐지만 근초고왕은 당당히 마한을 주도하는 백제라는 국호로 교류하기 시작했다.

또 이제까지 문자기사(文字記事)가 없던 백제가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서기(書記)를 편찬한 일도 근초고왕 때의 일이었다.

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은 바로 일본에서 발견된 칠지도(七支刀)다.

칠지도는 일본서기 신공황후 52년 9월 기사에 그 이름이 보이고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석상신궁)에 실물이 전해진다.

그런데 이 칠지도 앞뒤에 새겨진 명문을 놓고 이견이 분분하다.

대체로 근초고왕대에 이뤄진 일로 보이는 데 일본은 백제가 일본에 헌상(獻上)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우리는 하사(下賜)한 것으로 본다.

글=이기준 기자 poison93@cctoday.co.kr

사진=김상용 기자 ksy21@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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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인 '직지'의 실체를 세상에 처음 알린 박병선 박사(81·여)의 힘겨운 직장암 투병소식이 알려지자 청주시가 '박병선 박사 돕기 운동'에 나섰다.

올해 1월부터 매달 박 박사에게 200만 원씩의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는 청주시는 후원기관·단체 발굴 지원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특히 기업체, 병원, 독지가 등 공동모금회와 긴밀한 협조를 통해 박 박사 돕기 계좌를 개설하는 한편 산하 공무원 대상으로 자발적인 모금 활동을 벌이고, 이와는 별도로 천사(1004) 나눔운동 기금에서도 지원할 방침이다.이밖에 성모병원 원장 이현노 신부의 주선으로 지인들이 지난 4일부터 5일까지 모금 활동을 벌여 2865만 원을 모금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박 박사의 의료비는 4100여만 원이 체납된 상태이며, 앞으로 수술비가 별도로 더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박 박사는 지난 1972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기획한 'BOOK'S’전시회에서 직지를 공개해 직지가 현존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임을 세상에 알렸다. 이를 통해 ‘직지’는 독일의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 앞선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이 세계에 알려졌다.

전창해 기자 widesea@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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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구청 제공  
 
‘가을하늘을 닮은 호반과 1억송이 국화가 만나는 대향연’이라는 주제로 열린 ‘2009 대청호 국화향나라전’이 20일 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8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지난 달 20일부터 동구 추동 대청호자연생태관 일대에서 열린 대청호 국화향나라전은 20여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대성황을 이뤘으며, 특히 전국 각지에서 온 외지 관람객이 전체 30%인 6만여 명에 달하는 등 전국 규모의 명품축제로서의 성장가능성을 보여줬다.

총 6개 코스에 걸친 대청호 국화향나라전은 자연과 어우러진 국화꽃잔치로, 10만여㎡의 국화 행사장에 풍차와 대형 태극기, 기차 등 각종 토피어리·조형물과 함께 전국 국화작품 콘테스트 출품작 400여 점 등이 국화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생태습지와 오솔길, 주변 등산로와 산책로 등 주변 환경과 어우러진 자연친화적인 생태문화의 장으로 꾸며져 ‘자연을 닮은 가을 명품 브랜드’ 축제로도 호평을 받았다.

이번 국화향나라전은 19만여 명의 유료 관람객 유치로 6억 5000여만 원의 입장료 수입을 올렸으며, 2만 1000여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이장우 동구청장은 “지난 여름 온 도심을 뜨겁게 달궜던 대전역 영시축제에 이어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올 가을 또 하나의 대박축제를 탄생시켰다”며 “앞으로 타 축제와 차별화되는 프로그램 개발과 내실있는 준비를 통해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 가을 축제로 키워나가겠다”고 말했다.

황의장 기자

tpr111@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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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문화시설이 밀집해 있는 둔산 대공원 일대가 서민들에겐 '외딴 섬'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

대전 서구 만년동 일대 둔산 대공원 내에는 대전문화예술의전당, 시립미술관, 이응노미술관 등 주요 문화시설이 위치해 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한 접근성이 취약해 학생 등 서민들이 찾아가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 일대를 경유하는 7개의 버스 노선 중 2개 노선(606번, 911번)만이 이들 문화시설과 500여 m 이내에 정류장을 두고 있을 뿐 나머지 노선은 최소 10분에서 20분 정도를 걸어가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여기에 지역에 따라 환승도 쉽지 않은 데다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정확한 위치를 몰라 헤매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찾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더욱 늘어난다.

대전도시철도의 경우 ‘정부청사역’이 이들 시설들과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지만 이 역시 성인 보통걸음으로 20분 이상을 걸어야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민들은 "걷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공연시간에 쫓기거나 무거운 짐이 있거나, 아이를 데려가거나, 덥거나 추울 때는 정말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토로하고 있다.

이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해 문화시설을 찾아가기가 힘들어지면서 서민들의 문화향유 실태도 떨어진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경제 사정이나 문화에 대한 관심의 정도 등 변수가 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 찾아가기 힘든 것도 서민층의 문화향유를 저해하는 중요한 요인"이라면서 "보다 많은 서민들이 문화시설을 찾게 하려면 이들 시설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대안으로 “교통체계를 하루 아침에 바꾸기가 쉽지 않고 수요가 부족할 경우 적자 요인도 될 수 있다”면서 “먼저 정류장과 지하철 역사 주변 등에 문화시설 안내를 강화하고 이들 시설에 대한 관심을 끌 수 있는 홍보전략을 수립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시립미술관 관계자 역시 "대중교통 사정이 만족스럽지 못하며 관객 확충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쉽고 편리하게 찾아올 수 있다면 지금보다 이용객이 더 늘지 않겠냐"고 말했다.

김항룡 기자 prime@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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