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투데이 최 일 기자 딸 서연이(오른쪽)
김상용 기자 결혼식에서 만나다^^
서연이가 열흘 먼저 나왔다고 키가 더 크네...
둘 다 귀엽지 않나요^&^
빨리 크기를 소망했다. 어른이 되고 싶었다. 소년이 싫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처마 밑 대들보에 금까지 그어가며 키를 쟀다. 콩나물시루처럼 아침이면 부쩍 커있는 나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자라지 않았다. 사춘기는 아프기만 할뿐이었다. 목소리는 변성기를 앓고 가슴은 부질없는 속앓이를 했다. 무서웠다. 꿈조차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공부를 멀리 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눈을 팔게 되었다. 다름 아닌 딴따라. 친구들과 <좋은 친구들>이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나는 기타 치는 재주가 없어 부득불 드럼을 맡았다. rock~&~roll.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우린 벽촌으로 숨어들어 연습을 시작했다. 제천 두학면 자작리라는 곳인데 퍼스트 기타 겸 보컬을 맡은 친구가 그곳에 살았다. 비포장도로를 한없이 달려 종점에 다다르면 버스 돌릴 공터도 없는 깡촌(강촌)이었다. 그곳에 모인 네 명의 친구는 기타 두 명, 베이시스트, 드럼으로 나뉘어 밤낮으로 연습했다. 버스 종점은 사람을 그리움에 사무치게 하는 습성이 있다. 출발점을 종점으로 하고 종점을 출발점 삼는 버스를 보며 인생이 뭔가하는 감상에 젖는다.
드럼은 용돈을 모아 중고로 구입했다. 주로 연습한 곡은 ‘건아들'의 ’젊은 미소‘였다. 당시 젊은 미소를 완주(完奏)하면 다른 곡들도 쉽게 연주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 들국화(전인권), 부활(이승철) 등의 곡도 주된 연습곡이었다. 우린 네오나치 패거리들이 선호하는 스킨헤드를 하고는 날마다 쿵쿵따다~쿵쿵따다 했다. 물론 악보 보는 법을 잘 몰라 드럼의 경우 카세트 음악을 들으면서 음계를 카피했다. 들으면서 카피하면 청음능력도 좋아지고 각 파트의 소리의 차이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악보를 볼 줄도 쓸 줄도 모른다"고 말한 mr.Big의 빌리시안의 말처럼).
림숏, 하이햇 오픈-클로스 같은 기본적인 주법은 대강 교본을 보고 기본적인 레퍼토리를 구성하고 나머지는 대강대강 때렸다. 스네어 드럼(snare Drum)과 하이-헷 심벌(Hi-Hat-cymbal)을 기본으로 치고 크래쉬 심벌(Crash Cymbal), 스몰 탐탐(Small Tom Tom), 라지탐탐(Large Tom Tom), 라이드 심벌(Ride cymbal)등을 기각기 한다. 기각기는 스네어-스몰탐탐-라지 탐탐을 2연음이든지 3연음, 혹은 4연음 등을 리듬, 박자에 맞추어 차례로 돌려치는 것을 말한다. 하이햇이 8비트라면 각기는 16비트로 돌리면 된다. 쿵 딱 쿵 딱 두구두구 두구두구 두구두구 두구두구 챙~, 쿵딱은 킥과 스네어이고 두구두구는 스네어-스몰탐-라지탐-플로어탐을 말한다. 각기를 부드럽게 돌리려면 드럼의 고무판을 제대로 맞춰야 한다. 베이스 드럼(Base Drum)은 큰 북처럼 생긴 것으로 발로 꾹꾹 밟는다. 그런데 손과 발이 따로 놀아야 한다는 게 제일 고역이었다. 스네어드럼은 왼손, 하이-헷 심벌은 오른손, 오른 발로는 베이스드럼을 밟는데 박자에 따라 손발이 낑낑댔다. 엇박자였다.
친구의 집은 가난했다. 때문에 삼시(三時) 세끼가 문제였다. 밥은 있는데 반찬이 없었다. 그렇다고 젊은것들이 모여 공부는 안하고 미친 년 꽹과리 치듯이 놀고 있으니 반찬이 좋을 리 없었다. 1식1찬, 밥과 고추가 전부였다. 청양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는 게 유일했다. 청춘의 매콤한 반찬, 그래도 젊어서인지 눈물 콧물 다 빼며 맛나게 먹었다.
연습한지 두 달이 넘었을 즈음 초등학교 분교 운동장에서 첫 공연을 했다. 교단에 악기를 설치하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홍보를 했다. 심지어는 이장께서 마이크 방송까지 해주었다. 오후6시에 시작한 공연은 단 40분 만에 막을 내렸다. 관객이 30여명에 불과한 것도 맥 빠지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공연 자체가 엉망진창이었다. 화음은 둘째 치고 저마다 잘났다고 따로 놀았다. 곡이 맞을 리 없었다. ‘젊은 미소’ 한 곡이 끝나자 관객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드럼을 치다가 스틱이 날라 가는 사고도 있었다. 악사가 연장을 놓치다니. 완전한 실패였다. 연습이 짧았다는 자위(自慰)는 하나마나였다.
40분 만에 막을 내린 얄개들의 첫 공연은 결국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그후 드럼을 택시에 싣고 운반하는 도중 사람만 내리고 드럼은 놔두고 내렸다. 멍청한 드럼주인)
그동네 감나무 아직 안 익었습니다~
네잎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죠-김제동 어록 中 -
우리는 네잎클로버를 따기위해
수많은 세잎클로버를 짓밟고 있어요
그런데 세입클로버의 꽃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행복이랍니다
우리는 수많은 행복 속에서
행운만 찾고 있는것은 아닌지
최진실을 추모하며
아, 이 시대의 별이여
만인의 연인으로 살다간 별이여
배우로 살고 드라마처럼 살다 영화처럼 떠난 여인이여
불혹의 세월이 그리도 서러웠더냐
배우의 세월이 그리도 서글펐더냐
타인의 삶은 그리도 잘 사셨소만
어찌 자신의 삶은 그리도 무심케 버리셨소
연기하는 것처럼 살면 될 것을…
연기하는 것처럼 웃으면 될 것을…
바람처럼 떠나버린 그대여
연기처럼 사라져간 그대여
울지 마오, 울지 마오
지상에서 다 못한 무대 있거든
천상의 무대서 그 영광 다시 한번 누리소서
가슴에 묻어두오
가슴을 비어두오
그 가슴 따뜻이 품어 안고 편안히 영면하소서
<2008년 10월 2일 나재필 拜上>
▶별이 떨어졌다. 그녀는 스타 중 빅스타였다. 88년 청춘스타로 떠 20년 연기생활 내내 최정상에 있었다. 그가 뜨면 드라마가 떴고 그가 나오면 대박이 났다. 그야말로 흥행의 여신이었다. 이영자, 정선희, 이소라, 홍진경, 엄정화와 ‘6총사’의 우정을 나눈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로, 전 국민의 배우로 장밋빛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연예계 데뷔전 극심한 가난 때문에 자살을 여러 번 시도했었고 매니저 배병수가 살해당하고 조성민과 파경을 겪으며 풍상고초(風霜苦楚)의 삶을 살았다. 불혹을 넘기면서는 '줌마렐라' 열풍의 중심에 서 있었고 만인의 연인으로 중년의 남자들을 여전히 설레게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1993년 영화 ‘사랑하고 싶은 여자 & 결혼하고 싶은 여자’ 촬영장에서였다. 서울 충무로 시나리오작가 교육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당대 최고의 청순배우를 직접 만났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했다. 흰 블라우스와 청바지 차림의 그녀에게서 후광(後光)이 났다. 그녀를 염탐하는 동안 내내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작가가 꼭 되어 그녀를 내 시나리오의 여배우로 캐스팅하리라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그것은 이 시대 최고의 여배우를 향한 꿈이자 짝사랑이었다.
▶그로부터 6년 후 여의도 국민일보 CCMM 빌딩내 스포츠투데이 신문사에서 그녀를 두 번째 만났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톱스타였다. 여인의 향기가 났다. 그녀의 흰 손과 악수하며 전율했다. 미소마저도 흰 빛깔로 빛났다. 그녀는 1968년 12월생으로 나보다 10개월 늦은 동갑내기다. 마흔 한 살.
시나리오 나재필. 배우 최진실
나의 꿈은 하늘이 열리는 개천절 전날, 2008년 10월 2일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녀가 하늘로 떠난 것이다.
"야! 알바. 알바트로스가 얼마나 힘들게 비행을 하는지 알어? 바람이 불지 않으면 날수 없는 새.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날자...살자...."
(2005년 1월 12일 23시32분....한인섭 국장)
한인섭 국장이 나의 싸이월드 방에 들어와 남긴 말이다.
2005년 1월 굿데이신문은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퇴로에 섰다.
난 힘들었고 하루빨리 날개를 접고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회생의 길을 찾아 동분서주하던 한인섭 당시 굿데이신문사장은 끝까지 힘내자며 동행을 요청했다.
그가 누구인가. 춘천 태생으로 강원일보와 매일경제신문, 국민일보와 경향신문에서 지천명(知天命)이 넘도록 편집쟁이로 산 사람 아닌가.
(현재 한국언론재단 교수)
스스로 목수라고 자칭할 정도로 손재주가 남다른 사람. 인자한 얼굴과는 달리 편집만큼은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던 사람. 사람을 좋아해 후배와도 이른 새벽까지 술자리를 내달릴 줄 알던 주성(酒聖). 그는 '편집의 거성' 함빠꾸(함정훈 국장)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후배들이 제목과 레이아웃을 달아오면 여지없이 '빠꾸'를 시킨다고 해 붙은 함빠꾸 선생의 애제자였던 것. 그는 편집의 달인이었다. 그는 헤드라인 공장장이었고 사진 에디터였으며, 디자이너였다. 제목을 다는 기술과, 사진을 보는 안목과, 신문을 만드는 방법을 꿰고 있었다. 신문을 만들 때면 무서우리만큼 천착했고, 일등을 향한 끝없는 도전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노력은 2002 월드컵에서 빛나는 저력으로 나타났고 후배들로하여금 편집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광화문 광장으로 뛰어나가 호외를 뿌리던 편집기자들을 행복하게 했다.
언젠가 퇴사를 결심한 나의 누추한 집을 찾아온 적이 있다.
영화처럼 비가 내렸다. 눈물처럼 비가 내렸다.
후배 몇몇이서 선술집에 모여 들었고 우리는 빗소리에 울음을 감추고 소나기처럼 마셔댔다. 그는 나의 통장 잔고를 걱정했고 나의 아내와 자식을 걱정했다. 그는 편집의 대선배였고, 회사의 CEO였지만 뜨거운 눈물로 가족애를 보여주었다.
나는 다시 그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회사에
간이 목제침대를 만들어놓고 기거하면서 일을 했다. 그는 내 인생에서 알바트로스의 희망을 안겨준 사람이다.
<알바트로스.....>
알바트로스는 봉황이나 불사조 같은 새와는 달리 실재하는 새. 어떤 독수리, 어떤 갈매기보다도 멀리 그리고 높게 나는 새이다. 알바트로스는 알에서 깨자마자 바닷물에 떠다닌다. 당연히 비행법을 채 익히지 못한 알바트로스의 새끼들은 흉포한 표범상어들의 표적이 된다. 그러므로 알바트로스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상어의 이빨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의 날갯짓을 하게 된다.
대부분은 파도 위에서 퍼덕이다가 비행에 성공하지 못하고 상어의 먹이로 짧은 생을 마치게 되지만 구사일생으로 날갯짓에 성공을 하여 하늘로 떠오르는 녀석들이 있다. 이 최초의, 죽음의 비행에 성공한 알바트로스의 새끼들만이 강한 날개와 그 날쌘 비행술을 타고난 천재들만이 비로소 왕양한 하늘과 바다의 자유를 허락받게 되는 것이다.
생 명과 함께 치열한 비행의 모험을 동시에 타고난 이 알바트로스들의 드라마는 조나단의 그 미지근한 <갈매기의 꿈>과 비길 것이 못된다. 그렇기 때문에 보들레르가 시인의 운명을 발견했던 것은 갈매기가 아니라 알바트로스였다.(이어령의 '말속의 말')
나는 날고 싶어졌다.
어릴 적 꿈에 자주 날았던 그 창공을 다시 기억해냈다. 부러졌던 마음속의 날개를 다시 찾았다. 날개는 퇴화한 것이 아니라 진작부터 날개가 없었던 것이다.
...........
Albatros
골 퍼들의 꿈은 홀인원이지만 그것보다도 더한 것이 알바트로스. 600m 가량의 필드에서 단 두 번만에(규정타는 다섯 번) 맥주 컵만한 홀 안으로 공을 집어 넣어야 비로소 알바트로스가 된다.(골프는 양떼를 몰고 다니는 목동들의 놀이에서 유래된 것이라나...목동의 지팡이가 골프채가 되고 돌이 골프공으로 변하고 토끼굴과 같은 것이 홀컵이 된 셈). 한 개를 적게 치면 버디(birdy)가 되고 두 개를 더 적게 치면 이글(eagle)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 한계라고 할 수 있는 세 개를 더 적게 치면 드디어 그 알바트로스라는 것이 등장하게 된다.
외딴집은 밤이 길다. 어둠이 빨리 찾아들고 아침이 늦게 온다. 새벽은 밭은기침을 하고 아침은 외로운 몸살을 앓는다. 우리 집은 25여 년 간 외딴집이었다.
남 들은 대낮 같은 백열등을 쓸 때 우리 집은 등잔불을 썼다. 남들이 TV볼 때 우리 집은 라디오를 들었다. 남들 전자레인지 쓸 때 우린 석유풍로를 썼다. 남들 냉장고 쓸 때 우린 통풍 잘되는 곳에 야채를 놓았다. 보일러 대신 우물물을, 연탄불 대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외딴 집에 불을 밝히려면 전봇대 값을 개인이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전기를 놓을 수가 없었다.
너 무 무서우면 눈물도 나지 않는다. 너무 두려우면 오히려 겁이 없어진다. 너무 두려우면 되레 독해진다. 외딴집 2km 근방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가로등도 없었으며 인기척도 없었고 불빛도 없었다. 그저 어둠, 어둠…. 어둠 속에 징그러운 두려움만이 웅크리고 있을 뿐, 빛이라고는 없었다. 켕기는 두려움…. 간당간당한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부 모님이 부재중일 때 난 혼자 남겨졌다. 불 꺼진 집, 혼자 남은 외딴 집은 두려웠다. 도피할 수 없는 유배지였다. 공포의 감옥 같았다. 그래도 혼자 어둠을 깔고 앉아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을 짓고 소죽을 끓이고 개밥을 주었다. 그리고는 방안에 들어가서는 주먹만한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두려움을 잘근잘근 씹었다. 밖에서 부스럭 소리만 나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부모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것도 안 되면 손전등을 켜들고 마을 정류장으로 마중을 나갔다. 차라리 버스를 기다리며 멀뚱히 서있는 게 마음 편했다.
버 스가 지나가는 것을 한대, 두 대, 세대…. 셈을 세면서 멀뚱히 있다보면 반가운 ‘아군' 부모님이 오셨다. 버스 계단을 밟고 내려서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버지의 손에는 항상 센베과자나 모나까, 웨하스, 찐빵, 호두과자,
알사탕 봉지가 들려있었다. 마치 두려움을 이긴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처럼. 봉지를 받아든 난 저간의 공포는 까마득하게 잊고 군것질에 몸이 달아올랐다.
수 안보에서는 커다란 개울물을 사이에 두고 외따로 살았고, 제천에서는 높다란 산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살았다. 낮이 되면 마을사람들이 농사일을 하느라 집 근처 논밭에 한둘 나타났다. 사람이 반가웠다. 사람냄새가 좋았다. 사람이 나타나면 나도 모르게 손을 까불며 인사를 했다. 사람과의 손 인사가 정겨웠다. 그들은 이웃이었지만 산 너머 이웃이었다. 밤이 되면 없어지는 이웃이었다. 한 때는 ‘우리 집에 무슨 큰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외롭게 크면 눈물도 많아진다. 별거 아닌데도 서운하고 외로워진다. 도회지에서 친척들이 오면 저마다 한결같이 ’별장 같다‘고 했다. 신천지 같다고 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속에서 이름 모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가한 소리였다. 간만에 유희 삼아, 도락 삼아 놀러오면 분명 낭만적인 풍경일 것이다. 얄미운 사람들 같으니라고. 등잔불의 그을음, 등잔불에 타던 그리움, 그 그리움의 발원지, 그리고 그 어린 마음에 겹겹이 상처로 피어오르던 그을음은 아프고 시렸다.
그 후 몇 년이 흐른 후 전봇대 세 주를 사비(私費)로 박고 우리 외딴 집은 광명을 찾았다. 전기가 들어오고 냉장고와 TV가 들어왔으며 밥을 하더라도 전기밥통이 있어 밥이 식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도 부모님은 전기를 아끼신다. 틈만 나면 소등하고 웬만해서는 점등하지 않는다. 늘그막에 시작한 아파트 생활도 대 만족이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문명의 편리함이 아파트에 절절히 흐르기 때문이다. 옛 전원생활이 그립지 않느냐고 가끔 물으면 대답은 간단하시다.
“징그럽다, 징그러워….”
오늘은 우리 동네 골목길을 여기 저기를 2시간 가량 자전거를 타고 배회하였습니다.
한참 어릴적 대구에서 처음 이사를 와서 살던 골목길
부터 재개발 되고 있는 성남동까지.
골목이 아닌 큰 길로 가로 질러 자전거를 타고 가면 5분이면 가는 코스이지만 골목길만을 따라
가다보니 2시간이 훌쩍 가더군요. ^^
黑과 白, 깨알같이 박힌 마음의 행간.
텍스트는 도망가지 못하는 생각의 박제라네.
터럭 빠진 여백의 이랑에 흐르는 흑백의 발자국.
분단시대 지병 앓듯 지면은 고독한 유배지.
화톳불처럼 튀는 희로애락 담고
톡톡 튀는 사람들 천의 얼굴 싣고
때로는 치다꺼리, 때로는 푸닥거리
열 손가락 자수에 담아야 하는 고독한 수학자.
마치 외로움의 봇짐을 풀어놓듯
미완의 여백에 써내려 가는 외경의 작업일지.
재단사처럼 자르고 붙이고
작명소처럼 짓고 따지고
족집게처럼 뽑고 갸름하고
설계사처럼 나누고 쪼개고
헤드라인 공작실은 불온한 응급실.
허구한 날 앉아서 생인손 앓도록 마름질하고
그러다가 생각의 굳은살들이 찢겨
시장통 생선같이 널브러지면 그것이 데드라인.
오이디푸스도, 엘렉트라도 막지 못하는 고집스러운 콤플렉스.
그래도,
거마비 받고 악기 부는 악사는 아냐.
꺼지는 한이 있어도 드러눕지 않는 불꽃처럼
외설스럽더라도 발정하지 않은 만다라처럼
때로는 비뚜름해도, 때로는 고루해도
옹이 같은 아픔을 지우듯 딸깍발이 생은 간다.
그렇다고 덧칠하지 마. 그렇다고 자기네 생까지 편집하진 마.
잡티 묻은 채로 그냥 사는 거야.
쑥부쟁이 꽃대같이.
호화판 모꼬지는 없어도 비럭질하는 떨거지는 안 되게.
도돌이표 아침 해가 오늘도 하염없이 밝았으니.
☞“ 신문은 편집이다.” 편집기자 15년 동안 1000번은 들었다. 그 1000번의 되새김은 ‘존심’이었다. 외골수 같은, 스스로를 외통수에 놓는 느낌이었지만 그 외고집, 편집증(paranoid)적인 편집이 좋았다. 편집자는 연기와 불꽃이다. 서명이 남지 않는다. 한번 손을 대고 그 손을 놓는 순간 끝이다. 편집 대선배 한인섭 국장이 강조하던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다. 수많은 기사와 수많은 사건을 대하면서 인생을 배우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편집을 하면서 1000명의 사람을 만난 것을 더 행복하게 생각한다. 그 1000명은 편집기자로 1만여 판을 짜면서 사귄 자산이다. 그 중 서로의 팬으로써 지지하고 아껴주는 사람은 50여 명. 산에서, 직장에서, 술집에서, 운동장에서 우정을 나눈 참벗이다. 옷깃만 스쳐도 다쇼(多生), 전생의 인연이다. 그러나 사 람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사람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렵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더 어렵다. 뜻이 맞지 않는 사람을 피해가기가 먼저 어려운 일이고, 그 사람과 악연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기가 또 어려우며 결국 잘못된 인연으로 후회하지 않기가 제일 어렵다. 그들은 후회하지 않게 만든다. ‘현재까지는’이라는 전제가 필요치 않다. 내가 아프고 힘들고 ‘술이 필요할 만큼’ 외로울 때 그들은 달려와 술이 되고 말이 되고 어깨동무가 된다. 그들은 우정을 나누었고 일을 나누었다. 세상 돌아가는 흐름 속에서 그 흐름을 꿰뚫는 방법을 배웠으며 읽는 자와의 호흡을 또한 배웠다. 편 집을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편집에 대해 열병을 앓게 되면서 매일 매일이 두근두근거렸다. 지적 호기심이 일었다. 그 호기심은 영혼의 비타민 같은 거였다. 하루하루를 여백에 채우고 그 여백에 장식과 장치와 눈물과 감동을 버무렸다. 아침 식탁위에서 읽는 이로 하여금 하루를 여는 비타민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신
문사 편집국은 활어회 시장 같은 곳이다. 생선처럼 펄떡펄떡 뛴다. 싱싱하다. 그 싱싱함은 정신에서 오는 거라고 단언한다.
1면서부터 마지막 면에 이르기까지 숱한 정신이 ‘+-’ 전극의 충돌로 살아난다. 그 생선은 팔딱거리면서, 독자를 향해 내달린다.
그 전쟁터에서 살다보니, 그 우정은 전우애와 닮아서 더욱 진하고 아름답다. 잉크냄새 폴폴 풍기며 윤전기가 돌아가면 그 뒤는
술이다. 회포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똑같은 수명을 소진한다. 뛰며 펄떡이며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살아간다. 그 전우들이 함께 한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돌 지난 아가씨를 빡빡 깎았다고 혼만 났다.
그래도 빡빡이는 내 삶의 이유...
내 삶의 이유가그만 ...
눈치를 보던 지윤...그러더니 냉큼 풍선을 갖고 튀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