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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발발 60년만에 화랑무공훈장을 받는 참전용사 김광수 옹은 아직도 당시 상황이 생생하다고 말한다. 허만진기자 hmj1985@cctoday.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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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가까스로 살아남은 6·25전쟁 참전용사 김광수(82) 옹은 아직도 눈만 감으면 당시 상황이 어제 기억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김 옹은 최근 천안함 사건이나 서해교전 등을 지켜보면서 또 다시 6·25전쟁과 같은 대결과 반목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6·25발발 60년 만에 화랑무공훈장을 받으면서 명예를 찾은 김 옹은 당시를 떠올리면서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전쟁의 기억으로 순간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 직후인 1951년 겨울, 당시 나이 21살 때 군에 입대했다.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채 전장에 투입된 김 옹은 훈련동기들과 함께 육군 6사단에 배치돼 치열했던 강원도 금화와 철원 등에서 수백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특히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는 99일간 수차례 주인이 바뀔 정도로, 6·25전쟁사에서 치열하기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당시 중공군은 군사분계선 설정을 놓고 협상주도권을 쥐기 위해 작전상 유리한 수도고지를 빼앗으려 필사적이었기 때문이다.
김 옹은 "당시 관측병이었기 때문에 잠복을 하며 인민군 움직임을 살폈다. 그러다 갑자기 중공군 공격이 시작됐고, 빗발치는 포탄이 결국 우리 초소까지 날아들면서 다른 전우들이 한순간에 죽어버렸다"고 당시 살벌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또 미군과 함께 작전을 펼쳤던 아군은 기관총을 쏴가며 밀려 내려오는 중공군을 피해 한없이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지만 살아남은 전우는 거의 없었다면서 오랫동안 눈을 감기도 했다.
간신히 몸을 숨긴 참호로 쏟아지는 미군 폭격을 피해 가까스로 동료와 미군들의 목숨을 건진 사연도 털어놨다.
"미군 연락병이 교신 암호를 받아오다 죽고 말았어. 결국 우리가 숨은 곳을 알리지 못해 미군 4명과 우리군 3명이 몸을 숨긴 참호 인근까지 미군기 포격이 쏟아진 거지…. 그때 나는 순간 기지를 발휘해 참호에서 불을 피우기 시작했고, 연기를 본 미군기 아군이 있다는 것을 발견, 포격을 하지 않았어”라고 말했다.
김 옹과 부대장은 당시의 공으로 1계급 특진을 했고, 후방으로 배치된 후 이듬해 전역을 했다.
자신은 화랑무공훈장을 받아 6·25참전 명예는 찾았지만 전쟁의 고통과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점점 잊히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 옹은 "요즘 손자들을 봐도 6·25전쟁이 언제, 왜 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잊혀졌다"며 "나라를 위해 한 목숨 기꺼이 내놓은 우리 전우들을 오래 기억했으면 한다"고 작은 소망을 전했다.
조재근 기자 jack333@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