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언제나 마음속에 암굴(岩窟)처럼 웅크리고 있다. 질척거리는 삶에 내 몸 흔들려도 산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그것은 산 빛 너울이 짙기 때문이고 그리움의 농도가 깊기 때문이다. 오늘은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 날이다. 3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화(戰禍)는 남·북한을 폐허로 만들었으며 160만 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죄 없고 힘없는 민간인의 경우 남한에서만 99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남한서 퇴각하지 않은 인민군 빨치산(게릴라)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번 여정은 구례 쪽 지리산이다. 6·25전쟁 당시 빨치산의 본거지였고, 좌익과 우익의 이념적 대립이 가장 심했던 피의 영토다. 이제 역사 속에 그들의 흔적은 간데없다. 하지만 산은 남았다. 그러니 '기억에 없는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은 그 산을 따라가 보는 길밖에 없다.
지리산(구례)=나재필 기자
한국후방관구사령부(KComZ)가 작성한 정보 보고서 가운데 1952년 8월 27일 현재 남한 내 빨치산 1629명의 분포 지역과 활동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이 가운데 967명은 무장을 했고, 662명은 비무장이다. 또 전체 빨치산의 85%인 1386명이 남부 사령부에 집중돼 있으며, 96명이 중부사령부 지역, 69명이 북부 사령부 지역, 제주도에는 78명이 있다. 모두 구체적인 수치를 밝히고 있다. 미군의 한국전 관련 문서들은 빨치산을 ‘산적(bandit)’ 또는 ‘게릴라’로 표현하고 있고, 전투 부대의 정보 보고서에서 빨치산들의 규모와 활동 등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정규군의 작전 대상에서는 제외시키고 있다. 1952년 8월23~29일 사이에 총 109건의 빨치산 활동이 보고됐으며, 10개 그룹의 52명이 가담했다.
지리산은 넓고 깊다. 단순한 산이 아니라 산국(山國)으로 불려 넓이와 깊이가 있다. 백두대간 남단에 한민족 역사의 대들보를 올려놓은 산이 지리산이다. 영남의 함양·산청·하동 3개 군과 호남의 남원·구례 2개 군을 끌어안은 지리산 앞에서는 겸손부터 익혀야 한다.
지리산 빨치산은 금기의 과거다. 1948년 구례는 이데올로기의 격전지였다. 여순사건을 일으킨 반란군과 좌익간부들이 토벌대를 피해 지리산 구례로 퇴각했기 때문이다. 이들 반란군과 토벌대의 전쟁은 7년이나 계속됐다. 한때 빨치산의 해방구였고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그곳은 좌(左)와 우(右)로 가는 길이 수천 갈래 뻗어있다. 빨치산들은 스스로를 입산자(入山者)라 불렀다. 생계가 막막해서, 혹은 이념 때문에 그들은 입산자가 됐다. 60여 년이 흐른 지금 아무도 노려보지 않는 평화로운 산에 산객이 들어선다.
지리산은 신라 5악의 하나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하여 지리산(智異山)이다. 또 '멀리 백두대간이 흘러왔다'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6m)을 주봉으로 노고단, 반야봉 등 동서로 100여 리의 거대한 산악군을 형성한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능선을 중심으로 해서 각각 남북으로 큰 강이 흐르는데, 하나는 낙동강 지류인 남강의 상류로서 함양·산청을 거쳐 흐르고, 또 하나는 마이산(진안)과 봉황산에서 흘러온 섬진강이다.
지리산은 욕심 부리지 않고 타박타박 걸어야 한다. 잡아먹을 듯이 덤벼들면 산객이 길을 잃는 곳이다. 지리산 종주(縱走)는 해야 산객(山客)이라 명함을 내밀 수 있고, 백두대간 종주를 해본사람이라야 지리산 얘기를 꺼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 산행 코스는 주릉 종주(산행시간 2박3일)를 비롯해 중산리 방면, 칠선계곡 방면, 백무동 방면, 뱀사골 방면, 피아골 방면 등이 있다.
피아골서 임걸령으로 향하는 길은 비 때문에 촉촉했다. 발끝에 닿는 흙길은 바람처럼 가벼웠다. 하지만 협곡이나 산세를 보면 묵직한 습기가 느껴진다. 발끝에 걸린 돌먼지는 뼛조각처럼 풍화돼 있다. 비가 내려앉지 못할 만큼, 햇살이 비집지 못할 만큼 송림은 촘촘하다. 틈이 없다. 바람도 지리산에는 안주하지 못하고 빠르게 비켜간다. 이는 빨치산이 몸을 숨기고 10여 년간 신출귀몰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추위와 배고픔, 전염병과 싸우면서도 토벌대와의 끊임없는 사투로 야수와 다름없었던 그들에게 지리산은 천혜의 요새였다. 민가가 가까워 식량을 구하기 쉬웠고 섬진강 안개와 준령의 덤불은 몸을 숨기기 좋았다. 더욱이 피아(彼我)를 구별하기 힘든 고산(高山)이라 '치고 빠져나오기'에 훌륭한 방어막이었다. 찾기도 힘들고 찾아내도 공격하기 힘드니 이만한 '칩거'도 없는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드러내지 않기에 더 무섭기도 하다.
나재필 기자 najepil@cctoday.co.kr
지리산(구례)=나재필 기자
한국후방관구사령부(KComZ)가 작성한 정보 보고서 가운데 1952년 8월 27일 현재 남한 내 빨치산 1629명의 분포 지역과 활동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이 가운데 967명은 무장을 했고, 662명은 비무장이다. 또 전체 빨치산의 85%인 1386명이 남부 사령부에 집중돼 있으며, 96명이 중부사령부 지역, 69명이 북부 사령부 지역, 제주도에는 78명이 있다. 모두 구체적인 수치를 밝히고 있다. 미군의 한국전 관련 문서들은 빨치산을 ‘산적(bandit)’ 또는 ‘게릴라’로 표현하고 있고, 전투 부대의 정보 보고서에서 빨치산들의 규모와 활동 등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정규군의 작전 대상에서는 제외시키고 있다. 1952년 8월23~29일 사이에 총 109건의 빨치산 활동이 보고됐으며, 10개 그룹의 52명이 가담했다.
지리산은 넓고 깊다. 단순한 산이 아니라 산국(山國)으로 불려 넓이와 깊이가 있다. 백두대간 남단에 한민족 역사의 대들보를 올려놓은 산이 지리산이다. 영남의 함양·산청·하동 3개 군과 호남의 남원·구례 2개 군을 끌어안은 지리산 앞에서는 겸손부터 익혀야 한다.
지리산 빨치산은 금기의 과거다. 1948년 구례는 이데올로기의 격전지였다. 여순사건을 일으킨 반란군과 좌익간부들이 토벌대를 피해 지리산 구례로 퇴각했기 때문이다. 이들 반란군과 토벌대의 전쟁은 7년이나 계속됐다. 한때 빨치산의 해방구였고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그곳은 좌(左)와 우(右)로 가는 길이 수천 갈래 뻗어있다. 빨치산들은 스스로를 입산자(入山者)라 불렀다. 생계가 막막해서, 혹은 이념 때문에 그들은 입산자가 됐다. 60여 년이 흐른 지금 아무도 노려보지 않는 평화로운 산에 산객이 들어선다.
지리산은 신라 5악의 하나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하여 지리산(智異山)이다. 또 '멀리 백두대간이 흘러왔다'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6m)을 주봉으로 노고단, 반야봉 등 동서로 100여 리의 거대한 산악군을 형성한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능선을 중심으로 해서 각각 남북으로 큰 강이 흐르는데, 하나는 낙동강 지류인 남강의 상류로서 함양·산청을 거쳐 흐르고, 또 하나는 마이산(진안)과 봉황산에서 흘러온 섬진강이다.
지리산은 욕심 부리지 않고 타박타박 걸어야 한다. 잡아먹을 듯이 덤벼들면 산객이 길을 잃는 곳이다. 지리산 종주(縱走)는 해야 산객(山客)이라 명함을 내밀 수 있고, 백두대간 종주를 해본사람이라야 지리산 얘기를 꺼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 산행 코스는 주릉 종주(산행시간 2박3일)를 비롯해 중산리 방면, 칠선계곡 방면, 백무동 방면, 뱀사골 방면, 피아골 방면 등이 있다.
피아골서 임걸령으로 향하는 길은 비 때문에 촉촉했다. 발끝에 닿는 흙길은 바람처럼 가벼웠다. 하지만 협곡이나 산세를 보면 묵직한 습기가 느껴진다. 발끝에 걸린 돌먼지는 뼛조각처럼 풍화돼 있다. 비가 내려앉지 못할 만큼, 햇살이 비집지 못할 만큼 송림은 촘촘하다. 틈이 없다. 바람도 지리산에는 안주하지 못하고 빠르게 비켜간다. 이는 빨치산이 몸을 숨기고 10여 년간 신출귀몰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추위와 배고픔, 전염병과 싸우면서도 토벌대와의 끊임없는 사투로 야수와 다름없었던 그들에게 지리산은 천혜의 요새였다. 민가가 가까워 식량을 구하기 쉬웠고 섬진강 안개와 준령의 덤불은 몸을 숨기기 좋았다. 더욱이 피아(彼我)를 구별하기 힘든 고산(高山)이라 '치고 빠져나오기'에 훌륭한 방어막이었다. 찾기도 힘들고 찾아내도 공격하기 힘드니 이만한 '칩거'도 없는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드러내지 않기에 더 무섭기도 하다.
나재필 기자 najepil@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