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남동순 여사 |
유관순 열사와 함께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남동순 여사(108).
여성독립투사 중 유일한 생존자인 그는 91년 전 여성의 몸으로 일제의 폭압에 맞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그는 조국이 해방된 이후에도 한 평생을 애국과 계몽, 자선, 교육에 매진해 왔다.
10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3·1 만세운동의 숭고한 애국과 희생정신을 계승,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놓지 않고 있다.
충남 출신인 남 여사는 이화학당에서 유관순 열사와 함께 동문수학하며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혹독한 옥고를 치뤘다.
그는 유관순 열사와 함께 태극기를 앞세워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생전 유관순 열사의 활동상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생존자로 소중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유관순 열사의 표준영정 제작에도 참여해 당시 치열했던 상황과 얼굴 생김새, 체형, 복식 등을 고증했던 남 여사는 최근 초등학교 교과서에 유관순 열사의 소개글 미수록 논란에 대해서는 "절통(切痛)하고 부끄러운 일"이라며 참담해했다.
일제치하에서 신익희 선생이 결성한 '7인 결사대'에 홍일점으로 참여한 남 여사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했던 독립군에 직접 군자금을 전달하는 등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군자금을 옷 속에 숨겨 만주 등지를 오갔다"며 "여성인데다 어린 나이로 일본군의 검문과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애국부인회와 독립촉성부인회에서 임원을 맡아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여성계몽 운동을 벌여 뿌리 깊은 가부장적인 유교 관습으로 자아를 찾지 못한 여성들을 일깨웠다.
남 여사는 6·25 전쟁 당시에는 전쟁고아를 돌보는 봉사활동에 헌신했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처분해 지난 1953년 서울 낙원동에 50칸짜리 가옥을 구입, 고아원을 설립해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돌봤다. 독신인 남 여사가 스스로 "나는 아이들이 1000명"이라고 말할 정도로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들의 부모 역할을 자임했다.
그는 평생에 걸친 헌신적인 애국과 봉사활동으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비롯해 3·1정신대상 등 40여 개의 포상을 수상했다.
남 여사는 지금도 사단법인 '우리문화나눔'과 공동으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효와 애국'을 일깨우기 위한 '회초리데이' 행사에 참여하고 각종 자선사업과 강의활동도 활발히 하는 등 조국과 민족을 위한 열정과 헌신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남 여사는 1일 충청투데이 주최로 대전 엑스포 남문광장에서 열리는 ‘3·1절 자전거대행진’에 참석해 3·1 만세운동 당시의 생생한 애국 현장의 소리와 메시지를 전달한다.
김일순 기자 ra115@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