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인들의 상업.  
 
국가를 지탱하고 한 발 더 나가 발전을 도모하는 원천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경제적 기반이다.

삼국시대 백제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백제 경제산업의 근간은 무엇이었을까.

두 말 할 필요없이 농업이었다.

철제농기구의 보급과 이른바 소로 농사를 짓는 우경의 확대로 농업생산력은 크게 증가했고 이는 국가의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고구려·신라와 수백 년 넘게 전쟁을 하면서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기 위해선 농업기반이 튼실히 자리를 잡아야 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엄격히 분리된 고대사회에서 피지배계급, 즉 평민과 노비는 농사를 지어 삶을 영위하면서 동시에 조세부담을 졌다. 근초고왕대에 들어 중앙집권체계가 잡히면서 조세제도도 정비됐다. 백제의 농민이 국가에 납부했던 세금은 토지세에 해당하는 조세(租稅)와 지방 특산물을 세금으로 내는 공물세, 각종 토목공사에 징발돼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역(力役)이 있었다.

여기서 역역은 다시 관청에 동원돼 무상으로 노역하는 요역과 군복무를 위주로 하는 군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고구려와 신라를 방어하기 위해 백제땅에 쌓았던 수 백개의 산성들은 모두 이렇게 만들어졌다.

대체로 군역을 지는 정남(호구조사 단위 20~60세)은 대체로 3년간 복무했는데 이 기간은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선운산가(禪雲山歌)에서 보듯이 정해진 기한이 지났는데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군역 동원이 너무 빈번해 노역을 이기지 못한 백성은 타국으로 도망가기도 했다.

물론 지배계층은 나라의 흥망성쇄를 바라봤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뒷받침은 순전히 백성의 몫이었다.
   

▲백제인의 의복


모진 인생사를 이어가며 700년 백제를 지탱했던 백제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선 의복을 살펴보면 이렇다.

‘당서’ 백제전은 ‘서민은 붉은색이나 자주색 옷을 입을 수 없다’고 적혀 있는 데 이는 평민과 귀족의 복장이 달랐다는 얘기다. 백제인의 의복은 고구려와 비슷해 부인의 경우 포와 같은 것을 업었는데 소매가 조금 컸다고 전한다.

‘신당서’에서 고구려의 평민은 굵은 베옷을 입고 고깔을 썼다고 하고 ‘북사’에서는 머리에 절풍을 쓰는데 그 모습이 고깔과 같다고 전하고 있다.

‘양서’에 따르면 백제인의 상의는 복삼(複衫·겹옷)이라고 불렀다.

아직 백제인의 상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옷이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스키타이 계통으로 이해되고 있다.
   
▲ 백제역사문화관.

겹저고리의 길이가 길어진 형태인 장유라는 것이 있는데 양직공도에 나타난 백제사신을 보면 무릎에서 약간 내려오는 정도다.

저고리 위에 입은 옷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양직공도에 나오는 백제사신의 바지는 통이 넓고 밑단에 선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양복바지와 같은 형태로 한복처럼 대님은 매지 않는다.

백제인의 머리모양은 각양각색이다.

‘수서’와 ‘북사’ 등 중국 기록에서 백제의 기혼녀들은 머리를 둘로 나누어 정수리에 얹은 형태(얹은머리)를 했고 미혼녀는 머리를 묶어서 뒤로 늘어뜨렸다(채머리)고 전하며 ‘주서’에서는 쪽진머리(머리를 뒤통수에 낮게 트는 양식)에 대한 설명도 보인다.

상투는 고대 한국 남성의 대표적인 머리모양으로 삼국지 한전에 기록이 있다.

신발은 가죽신과 짚신, 삼으로 만든 미투리 등이 있다.

무령왕릉에선 금동신발이 출토됐는 데 이것은 장례용 등 의례용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옷감에 대해서도 유추가 가능하다.
   

‘북사’ 백제전에는 조세와 공물로 베, 명주, 사(絲), 마포 등을 바친다는 기록이 있어 이러한 직물들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후한서’나 ‘한원’에는 삼한시대에 이미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짰다는 기록이 있는 데 지금의 서천 한산이 유명하다.

이밖에 흰솜, 오색비단, 탑등(모직물로 만든 담요), 라(얇은 비단옷) 등에 관한 기록도 확인된다.

‘라’는 복두, 관, 옷고름 등에 국한해 이용됐던 아주 귀한 직물로 부여 능산리고분 등에서 확인됐다.

백제의 관복은 자주색과 붉은색, 푸른색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백제인은 다양한 염색법을 알고 있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베틀로 짜면서 사이사이에 색실을 넣었던지 아니면 물을 들이는 다양한 염색법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장군의 복장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단지 백제의 갑옷에 대한 기록만이 남아 있다.

백제 무왕과 의자왕대에 당나라에 바쳤던 갑옷 중에 빛이 나는 명광개, 황금색을 옻칠한 금휴개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 등이 나온다.
   

명광개는 서역 갑옷의 특징을 지닌 것으로 가슴 부분에 원형의 큰 철판이 붙어있는 데 이런 형태의 갑옷은 백제의 영토에선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부여에선 동물뼈로 만든 찰갑(비늘갑옷)이 나왔는 데 이런 골제 찰갑은 가벼워 고위 지휘관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백제인의 밥상

백제인의 주식으로는 쌀, 보리, 녹두, 밀, 귀리 등이 확인되는 데 한 가지 곡규가 아닌 잡곡류가 주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벼농사가 가능했지만 쌀은 비교적 귀한 곡물이었던 것으로 보아 일반 서민의 밥상 위에 오르긴 힘들었을 것이다.

반찬은 채소류가 주를 이뤘으며 소, 돼지, 닭 등을 불에 익히지 않고도 먹었다고 전해진다.

백제유적을 보면 당시 마(삼)도 재배됐는데 마는 의복 제작뿐만 아니라 그 씨를 식용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풍납토성과 부여 궁남지, 광주 신창동유적 등에서 매실, 박, 조롱박, 살구, 밤, 복숭아, 모과, 가래, 잣, 오이, 참외, 호도 등과 각종 채소류의 씨앗·껍질 등이 출토되기도 했다.
   

여기에선 또 각종 동물뼈도 나왔는 데 말과 소, 돼지, 사슴, 개, 닭, 멧되지 등이 식용으로 이용됐음을 알 수 있으며 도미와 잉어, 민어, 상어, 정어리, 조기, 돔, 준치, 메기 등과 같은 어류의 뼈와 고동, 재첩, 백합, 우렁, 다슬기 등의 유체도 확인됐다.

조미료로는 소금이 많이 사용됐으며 마늘과 조피, 미나리, 생강, 차조기, 겨자, 여귀잎, 쑥 등은 향신료로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조피는 산초나무의 열매로 민물고기의 비릿한 냄새를 없애고 매콤한 맛을 내는 데 유용하다.

물론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나타난 다양한 조리기구와 취사시설 등을 감안하면 굽고, 찌고, 끓이고, 말리는 요리법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먹을 때는 숟가락과 젓가락이 이용됐는데 지배층은 청동으로 만든 것을 이용했고 일반 평민은 나무로 만든 것을 이용했다.
   

▲백제인의 보금자리

한성시대의 도읍이었던 풍납토성에는 수십 기의 집이 확인됐는 데 대부분 땅을 파서 만든 움집이다.

집안에서 부뚜막이 확인됐고 지붕에 사용했던 기와도 출토됐다. 육각형 주거 등 규모가 큰 집은 고위층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데 발굴 규모가 작아 울타리의 존재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사비시대 도성 안에 있는 집은 나무로 만든 울타리나 돌담이 있었음이 확인됐다.

또 한 집에 용도가 다른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다.

왕궁이나 사찰 등에는 우물이 확인됐고 부유한 집의 경우 별도의 작업장도 갖추고 있었다.

지방의 경우 백제시대 마을은 80기 이상의 집이 모여 있는 경우부터 단지 몇 기의 집만 있는 경우까지 다양하다.
   
▲ 백제인의 농업 모습.

저장시설은 대부분 구덩이를 파서 만들었고 고상창고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 군수리유적에서는 여러 채의 건물이 확인돼 건물별로 용도의 구분이 보인다.

다만 한 건물에 하나의 방만이 확인된다.

안채로 보이는 건물은 집 중심에 위치해 있는데 방안에 부뚜막 시설이 있는 것으로 봐서 방안에서 취사가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건물 옆에 주거용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는데 여기서는 부뚜막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기준 기자 poison93@cctoday.co.kr

사진=김상용 기자 ksy21@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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