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부흥군과 유민들이 나당연합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위치한 임존성.김상용 기자 ksy21@cctoday.co.kr  
 
한반도 삼국사에서 백제가 가장 웅대하게 꿈을 펼친 시대는 근초고왕(346~375) 때였다.

한강유역을 기반으로 국력을 신장시켜 지금의 평양지역까지 세력권에 포함시키면서 고구려를 압박했다.

그러나 근초고왕이 가고 고구려에 담덕(광개토왕)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백제 아신왕은 희대의 라이벌을 만나 10년 가까이 고군분투 했지만 전세를 다시 역전시키진 못했다.

475년, 결국 백제는 광개토왕의 자리를 계승한 장수왕에게 나라의 태생지인 한강유역을 내주고 만다.

웅진(공주)에서 재기를 노린 백제는 동성왕과 무령왕, 성왕을 차례로 거치면서 왕권을 회복하는 등 전열을 정비했다.

신라와 동맹을 맺은 백제는 사비천도(538·성왕16년)를 통해 내부결속을 다지고 고구려와의 일진일퇴의 공방전 속에서 결국 553년 한강유역을 회복한다.

이로써 한반도의 힘의 균형추가 맞춰지는 듯 했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 사력을 다해 기력을 소진한 백제는 신라에게 뒤통수를 얻어 맞는다.

숙원이었던 한강유역을 손에 넣었지만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은 곧바로 신라의 손으로 넘어갔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백제는 이를 갈며 말머리를 경주로 돌리기 시작했다. 가야와 함께 바다건너 왜(일본)까지 끌어들여 신라정벌에 나섰고 결국 관산성(충북 옥천 추정) 전투에서 승기를 잡는 듯 했다.

그러나 백제에 또 한 번의 불운이 찾아온다.

관산성 전투의 선봉에 선 아들 여창(위덕왕)을 격려하기 위해 성왕이 직접 길을 나섰다가 신라에 사로잡혀 비참하게 참수당한다.

이로써 백제의 주적은 고구려가 아닌 신라로 바뀌었고 이후 백제와 신라는 100년 넘게 줄기차게 전쟁을 벌이게 된다.

◆사활을 건 백제와 신라의 전쟁

백제 무왕(600~641)을 거치면서 백제는 다시 왕권을 안정시키고 군사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 같은 안정을 바탕으로 신라에 대한 보복에 나선 의자왕은 즉위 2년(642)째부터 줄기차게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그해 신라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키고 신라 도읍(서라벌·경주)으로 통하는 관문인 대야성(大耶城·합천 추정)까지 취했다.

성왕에 대한 복수였을까, 이 과정에서 백제장군 윤충은 대야성주인 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랑(김춘추의 딸)의 목을 베어버렸다.

서라벌을 향한 직접적인 압박과 함께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대당교역의 요충지인 당항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틈을 노리면서 외줄타기를 해 온 신라는 이미 한반도에서 공공의 적이 돼 버렸다.

이제 신라에게 남은 희망은 오직 바다 건너 당에 있었다.

7세기 중반에 벌어진 전쟁의 양상은 국경을 접한 나라들끼리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는 형국이었다.

642년 정변을 통해 실권을 잡은 고구려 연개소문은 당 태종의 대규모 공격을 잘 방어했고 백제와 함께 신라의 영토를 차지해 갔다.

신라의 멸망이 목전에 다가오자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당을 끌어들이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고구려를 직접 멸하기에 앞서 백제를 친다면 앞뒤에서 고구려를 압박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고구려에 연전연패한 당은 이 같은 신라의 전략에 귀를 기울였다.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친 뒤 북상해 고구려를 접수하고 궁극적으로 한반도를 손에 넣겠다는 계산이었다.

◆신라, 당나라를 끌어들이다

대고구려 전략을 수정한 당은 659년 10월 백제 출병을 결정한다.

나당연합 사실이 알려지면 바다를 건너야 하는 군사작전이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보안유지를 위해 신라 사신을 곧바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당과의 연합작전을 준비하고 있던 신라가 당의 출병소식을 공식적으로 접한 건 660년 4월이었다.

5월 26일 태종무열왕(김춘추)은 서라벌을 떠나 삼년산성(보은)에 주력을 남기고 남천정(경기도 이천)으로 이동, 당을 기다렸다.

6월 21일 13만 당군이 서해 덕물도에 도착하자 신라 태자 법민은 이들과 함께 전략을 논의하며서 7월 10일 사비도성 남쪽에서 합세하기로 결정한다.

전열을 가다듬은 당은 지금의 태안 앞바다를 돌아 7월 9일 기벌포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보병과 기병은 강둑을 따라 수군과 함께 나란히 금강 평야지대를 통과해 10일 날짜를 맞췄다.

반면 보은-옥천-금산(탄현)-논산(연산) 루트를 결정한 신라는 탄현을 넘어 7월 9일 연산 황산벌에 도착한다.

계백이 이끄는 5000결사대는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과 맞서 연전연승하지만 결국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길을 내주고 만다.

치열한 황산벌전투로 김유신은 당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하루 늦게 합세지점(논산 강경 추정)에 도달한다.

전열을 정비한 나당연합군은 7월 12일 사비도성을 향해 진격했고 결국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은 7월 18일 사로잡혔다.

소정방은 그해 9월 의자왕을 비롯해 1만 2000여 명의 유민을 이끌고 귀국하면서 정림사지5층석탑에 전승기념문을 새겨넣었다.

◆사비도성 함락이 끝은 아니었다

의자왕의 항복으로 28왕·678년 백제사직은 끝을 맺었지만 백제인 모두가 나라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고도의 문화를 향유하면서 한반도의 패권을 다퉜던 백제인은 망국의 한을 간직한 채 곧바로 부흥운동에 나선다.

복신과 도침, 흑치상지, 사탁상여, 여자신 등이 임존성과 주류성을 중심으로 백제부흥군을 이끌면서 전세를 역전시켜 나간다.

660년 9월 23일에는 사비도성을 포위해 수복 직전까지 간다.

당시 백제 땅에 있던 200여개의 성 가운데 웅진성과 사비성을 제외한 모든 성이 부흥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때마침 왜(일본)에 건너가 있던 백제왕자 풍(豊)이 돌아오자 백제왕조가 다시 이어지는 듯 했다.

백제부흥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러나 661년 웅진강구전투와 두량윤성(충남 청양 추정)전투 이후 부흥군 지도부 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다시 풍이 복신을 죽이는 내부분열이 일어난 것.

이 같은 상황에서 663년 8월 왜가 대규모 수군을 파견해 백제부흥군과 함께 마지막 일전을 벌였지만 결국 대패하고 만다.

이른바 백강구전투마저 무위로 돌아가고 나당연합군에 의해 주류성까지 함락되고 만다. 여자신이 지휘한 백제부흥군이 임존성에서 마지막까지 버텼지만 여기까지였다. 3년간 전개된 가열찬 백제부흥운동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임존성은 현재 충남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성으로 확실시 되고 있지만 주류성에 대해선 이견이 있다.

서천군 한산면 건지산성, 전북 부안 우금산성, 홍성의 학성, 연기의 당산성 등이 거론되고 있다.

백강을 동진강으로 이해하고 주류성을 우금산성으로 비정하는 학설이 있지만 백강을 금강으로 비정하는 데 더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렇게 되면 당군이 상륙한 기벌포(伎伐浦)는 금강하구가 된다.

백제부흥운동이 일었던 3년간 충남을 중심으로 한 백제영토는 나당연합군에 맞선 백제부흥군의 함성으로 뒤흔들렸다.

지금도 백제부흥군의 거점이었던 임존성에 가면 백제인의 피맺힌 절규가 메아리쳐 돌아오는 듯 하다. 글=이기준·사진=김상용 기자 poison93@cctoday.co.kr

본 기획취재는 충남역사문화연구원과 공동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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