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웅진은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쪽으론 계룡산이 막고 있어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는 방어적 요새였다. 사진은 공산성 전경. 김상용 기자 ksy21@cctoday.co.kr  
 

4세기 초, 한반도의 완충지였던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숙명이 시작됐다.

당시 백제엔 근초고왕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기에 낙랑과 대방을 백제의 영향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평양성전투를 통해 백제는 고구려와 대적할 만한 힘을 갖췄다는 것을 입증했고 한동안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으나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391년 담덕(談德)이 고구려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한반도 힘의 균형은 또 다시 요동치게 되는 데 그가 바로 광개토왕이다. 광개토왕은 즉위 이후 곧바로 옛 영토, 즉 낙랑과 대방 회복에 나서 승승장구하며 백제의 본거지인 한강유역 목전에 이르게 된다.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백제의 아신왕은 수 차례에 걸쳐 고구려에 대한 보복을 감행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고구려 장수왕은 아예 427년 평양성으로 천도해 본격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한다. 평양천도 이후 기반을 다진 장수왕은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으로 진격, 결국 한성백제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웅진에서 재도약을 꿈꾸다

백제 개로왕이 한성백제의 몰락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뒤 문주왕이 바통으로 이어받았다.

당시 상좌평이었던 문주는 위급한 상황에서 신라로 원병 요청을 떠난 터라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엔 문주가 개로왕의 아들로 나오지만 정황을 보면 개로왕의 동생이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 견해다. 목협만치, 조미걸취 등 신하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문주왕은 새로운 도읍을 찾게 되고 마침내 웅진에 이르렀다.

웅진은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쪽으론 계룡산이 막고 있어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는 방어적 요새였다.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가 중국과의 소통도 담보할 수 있는 입지적 요건을 갖고 있었다.

한성기, 백제의 영향력에 있었던 웅진지역엔 상당한 힘을 가진 지방세력이 건재해 있었다. 공주 수촌리고분군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식리, 환두대도, 중국제 도자기 등을 여러 대에 걸쳐 부장한 것이 확인되는 데 이것은 그만큼 큰 지방세력으로서 입지를 갖고 있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문주왕은 일단 급한대로 방어적 입지가 좋은 공산성에 왕궁을 조성하고 주위에 성곽과 여러 경청 시설들을 단계적으로 마련해 갔다. 문주왕 즉위 3년, 삼근왕 즉위 3년을 이어가면서 웅진백제는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갔지만 여전히 왕권은 확립되지 않았다. 웅진으로 천도한 뒤 정치적 불안을 극복하고 다시 왕권을 수립한 건 동성왕이 즉위하면서 부터다.

동성왕은 지방세력을 등용하는 방식으로 이들을 다독이면서도 신라와의 통혼을 추진해 즉위 15년, 신라 이벌찬 비지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왕비족의 전횡을 막으면서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통해 고구려의 압박에 대응하는 일석이조의 선택이었다.

왕권은 어느정도 안정됐지만 동성왕도 정치적 혼란을 완전히 수습하진 못하고 결국 암살이라는 최후를 맞게 됐다.

   
▲ 백제 문주왕은 방어적 입지가 좋은 공산성에 왕궁을 조성하고 주위에 성곽과 여러 경청시설들을 단계적으로 마련, 부국강병의 기틀을 다졌다.

◆무령왕 등극과 강국 선언

501년 동성왕이 피살된 뒤 무령왕(사마왕)이 왕위에 올랐다.

무령왕의 등극 과정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지만 한반도 패권에 또 한 번 파란을 일이킨 인물임엔 틀림없다. 무령왕은 왕위에 오른뒤 곧바로 부여 씨 왕족을 중용해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농업용수 확보 등 사회경제적 기반을 마련, 정권을 안정시켰다.

왕권의 정통성을 바탕으로 무령왕은 즉위한 해 12월 달솔 우영을 보내 옛 백제의 영토였던 수곡성(황해도 신계 추정)을 선제공격했고 즉위 2년엔 고구려의 변경을 교란하기도 했으며 12년(512년)엔 가불성과 원산성을 공격한 고구려군을 대파했다.

무령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하면서 백제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대외적으론 백제의 위상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무령왕대에 다시 고구려와 세력균형을 이루면서 옛 백제의 영광이 서시히 꽃을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무령왕릉으로 본 백제

1971년 봄, 공주 송산리고분에 대한 보수정비 대책이 세워졌다.

그해 여름 장마에 대비해 배수로를 만들기 위한 터파기 작업이 한창일 무렵 공사인부의 삽 끝에 뭔가가 걸렸다. 땅 속에 또 하나의 무덤이 있다는 신호였던 셈이다. 바로 거기서 한국 고고학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발견이 이뤄졌다. 바로 무령왕릉이었다. 삼국시대 수 많은 고분들 가운데 묘지의 주인을 알 수 있는 무덤은 무령왕릉 하나다.

왕릉에서 지석(誌石·묘지명)이 발견됐는 데 여기에 ‘사마왕’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적혀 있다. 무령왕릉에선 당시 백제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108종 2906점의 부장품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도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중 12개의 유물이 국보로 지정됐다.

무령왕릉 발굴만으로 국립공주박물관이 세워졌을 정도다. 무령왕릉의 발굴이 있었기에 백제사에 대한 고고학적 시대판단도 가능했다. 고고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출토된 유물의 연대를 추정하는 것인 데 그 기준점이 된 것이 바로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이다.

글=이기준 기자 poison93@cctoday.co.kr

사진=김상용 기자 ksy21@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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