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했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2년간의 본격적인 논의 끝에 여야 합의, 즉 국민적 합의로 법을 만들어 5년간 추진해 온 행정도시 건설 사업이 결국 정권교체의 유탄을 맞고 있다는 평가다.

2007년 대선정국에서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지지율이 앞서가면서 단순히 우려는 제기됐지만 ‘행정도시 백지화’ 가능성은 ‘설마’의 수준을 넘어서진 않았다.

이명박 당시 후보의 ‘강력한 약속’이 충청권 민심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수 차례에 걸쳐 ‘행정도시 계획은 되돌릴 수 없다. 자족기능을 보강해 이명박표 명품도시를 만들겠다’고 공약했고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행정도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행정도시 원안추진’ 의지를 거듭 내비쳤다.

이 대통령은 한 발 더 나가 대선 당시 대전·충남권 공약발표회에서 “이명박이 대통령되면 행정도시가 안 될 것이라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명박은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킨다”며 그간의 우려를 일축했다.

◆국민 우롱한 허언의 시작

약속한 건 지킨다는 이 대통령은 취임 2년이 가까워 오는 시점에서 스스로 약속을 저버렸다. 명분은 ‘국가 백년대계’다.

이 대통령은 정운찬 총리가 행정도시 수정론 운을 띄운 뒤인 지난달 17일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장·차관 워크숍에서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정책에는 적당한 타협이 있어선 안 된다. 정권에 도움이 안 될지라도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한 때 오해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안+알파’를 공약하긴 했지만 행정도시가 국가 백년대계에 도움이 안 된다면 오해를 받더라도 약속을 철회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행정도시 문제는 이명박 당시 후보 개인이 국민에게 한 약속 차원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국가의 백년대계는 대통령 혼자 결정하고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게 충청지역민의 반론이다.

더구나 ‘무엇을 어떻게 수정할 것인지 3개월 안에 만들어 내겠다’는 발상 자체가 국민을 무시한 독선이라는 여론이 높다.

행정도시 수정 공식화로 국가 신뢰도 추락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손바닥 뒤집듯 하는 대통령의 결정은 차치하고 대한민국에선 국회가 보증했고 이미 5년 이상 진행된 사업도 한 순간에 백지화될 수 있다는 불안감만 조장됐다는 얘기다.

충청권비대위 관계자는 “국민 조차 정부와 정치권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마당에 외국이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국가 신인도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며 국가 신뢰도 추락에 따른 파장을 우려했다.

◆5년 진행된 사업 놓고 국민투표?

행정도시 문제가 지속적으로 이슈화되면서 청와대와 여당은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청와대 고위 인사의 말을 빌어 수정론이 나왔다 다시 봉합되고 여권 지도부에서도 ‘원안추진이 당론’이라고 했다가 다시 수정론이 공론화되자 ‘정부 대안을 지켜보자’는 쪽으로 바뀌었다.

최근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국민과의 약속을 강조하면서 ‘원안+알파’가 당연하다는 입장을 나타내자 공성진 의원 등 한나라당 내 친이계 인사들은 ‘과거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대한 약속도 중요하다’며 국민투표로 묻자는 제안을 내놨다.

국정 시계바늘을 7년전으로 돌려 2003년과 2004년에 논쟁하고 2005년 법으로 매듭지은 사안을 놓고 국민투표를 하자는 얘기다.

그러나 충청주민들은 ‘행정도시 문제를 놓고 국민투표를 하자’는 말 자체에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면서 ‘만약 꼭 국민투표를 해야겠다면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의원들은 직을 걸어야 할 것’이라고 반문하고 있다.

충청권비대위 관계자는 “행정도시의 경우처럼 이견이 있으니까 국책사업에 대해 사사건건 국민투표로 결정하자고 하면 국가가 감당할 수 있겠냐”며 “행정도시 문제를 놓고 국민투표를 하겠다면 먼저 4대강사업이나 미디어법, 한미FTA 등을 놓고 국민투표를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완구 충남지사도 이 같은 점을 우려했다.

이 지사는 9일 “여론조사나 국민투표로 할 것 같으면 국회는 왜 필요하고 법은 왜 만드느냐”며 “자꾸 국론을 분열시키는 쪽으로 가지말고 통합의 관점에서 이성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기준 기자 poison93@cctoday.co.kr
Posted by 충투 기자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