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삼국 가운데 손꼽히는 문화적 역량을 지녔던 백제.
백제문화의 우수성은 금동대향로, 왕흥사지출토사리감 등의 유물을 통해 증명되고 있고 특히 각종 문헌과 자료를 통해 증명되고 있는 국제성과 교류성에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백제는 중국과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백제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형성했고 이를 일본에 전해 일본문화의 근원을 이루도록 도왔다.
백제인이 일본 다자이후, 미사토죠 등에 도래해 상류 지식계층으로 활동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고, 중국의 의자왕의 후손들은 ‘부여태비묘지명’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당 황실과 관련되는 지배계층으로 활동했음이 입증되고 있다.
최근 우리의 역사 속에서 백제가 차지하는 의미를 되새기고 백제문화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정비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부여는 백제문화의 부흥기였던 사비시대의 123년간 도읍으로 백제문화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고장이다. 부여에서 고대 동아시아 교류왕국 백제와 관련된 중국과 일본의 관계자를 초빙해 고대 동아시아 문화발전의 선도 역활을 하였던 백제의 위상과 역활에 관한 국제학술포럼을 개최했다.
다음은 포럼 참가자들의 발제 내용.
◆중국 하남성 낙양에서 발견된 당대 백제인 묘지 개설
-자오전화(趙振華)(중국 하남성 낙양사범대학교 하락(河洛)문화연구센터)
고도 낙양은 개방의 매력과 포용의 가슴으로 타지역 외국인들을 도시와 마을에 모여들게 했으며, 중국 본토의 사람들과 이웃이 되어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였다.
당 고종 때 양경(兩京)은 백제유민을 안치한 중요한 지역으로, 그러한 내용은 문헌 사료와 출토 묘지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다.
이 외에 세계문화유산인 용문석굴의 당대 불상 제기에도 한반도 사람들의 종적을 볼 수 있으며, 이런 것은 신라 승려들이 만든 신라상감(新羅像龕) 뿐 아니라, 백제국 왕실 부여씨(扶餘氏)가 만든 상감도 있다.
낙양에서 부여융묘지(扶餘隆墓誌)의 출토된 후, 현재 묘지는 정주에, 덮개는 낙양에 소장돼 있다.
출토 시기와 지역에 대해서는 낙양출토석해시지기(洛陽出土石刻時地記)에 기록을 해 놓고 있지 않다.
부여융묘지는 출토된 후 하남성 개봉시에서 수년간 소장을 했다. 낙양의 역대 현장(縣長) 또한 수집한 묘지 등을 성으로 올려 보존하였다.
부여융묘지에는 영순원년(682년) 12월 24일 북망 청선리(淸善里)에 장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묘지의 출토 위치가 없고, 청선리는 낙양에서 출토된 수천기의 묘지 중 이것 하나만 보이기 때문에 청선리의 위치를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또, 청선리가 어느 향과 어느촌에 속해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묘지와 비교하여 연구하기도 매우 어렵다.
단지 낙양 성북의 망산(邙山) 위에서 장사지냈다는 것만 명확히 확인할 수가 있다. 현재는 단지 문헌사료에만 근거해 묘의 소재지를 찾을 수 밖에 없는데, 매우 곤란하다.
◆백제도래·의자왕의 후손 정가왕과 백제마을
-타바루 마사토(일본 원남 향촌)
백제 왕족의 신문(神門) 정착은 그 당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었을까.
왕족들의 인격과 식견을 접한 마을사람들은 한없는 존경과 동경심을 갖고 신처럼 모셨을 것이다. 비목신사(比木神社) 근처에는 복지왕의 묘라고 전하는 오륜석탑이 있다. 이 전설 내용은 천수년이라는 긴 세월에 가로막혀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정가왕(禎嘉王)의 가계도 역사적으로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전설을 증명이나 하듯이 친자대면 축제와 시와스 축제가 지금까지 연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것은 90㎞나 떨어져 있는 목성전(木城町) 비모신사에 모신 장남 복지왕이 1년에 한번 아버지 정가왕과 재회한다는 것이다.
순행할 때의 영체(靈體)를 후쿠로가미라고 부른다. 영체를 주머니 모양의 헝겊에 싸 장대 끝에 달아 왼쪽 어깨에 높게 내걸어 순행하는 작법을 완고하게 지키고 있다.
이것은 어여(御輿)에 영체를 옮겨 실어 순행하는 형태보다 한층 더 고풍스러운 양상을 전하는 것으로 일본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이 사주(師走) 축제는 그 후 문화청의 학술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일본 내에서도 매우 고식으로 남아 있는 예로써 기록보존 해야 할 문화재라는 국가 지정을 받았다.
또한 이 축제에는 고대 백제의 풍습이 남아 있다고들하여 한국에서 파견된 학술조시단도 찾아와 1996년에 '백제 왕족 전설의 수수께끼를 풀다'라는 제목으로 국제심포지엄을 남향촌(南鄕村)서 개최했다.
그리고 신예선사에는 백제왕족의 유품으로 전하는 보물로 아주 오래된 판자지붕 신전 등이 있다.
신전은 2000년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또한 왕의 묘로 전하는 후기 고분에 속하는 소형 원분(圓墳)도 존재한다.
관광시설에 대해서도 촌민이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1990년에 백제관을 개관하였다. 백제관은 한일우호의 심볼로 백제를 이미지한 건물로써 백제 왕궁터에 세워져 있던 객사를 실물크기 그대로 건축했다.
건축에 임해서는 한국 정부의 협력을 받아 도면을 빌리고 기와와 포석(鋪石)을 한국에서 들여왔다. 서까래와 대들보를 장식하는 단청은 한국의 단청 기술자 7명이 와서 솜씨를 발휘했다. 현판은 전 총리 김종필씨의 자필로 씌여져 있다.
◆일본 속의 백제왕족과 그 후예
-이다운(원광대학교 )
백제가 고대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러한 사실은 여런 문헌기록 뿐만이 아니라 고고학적 물적 증거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4세기 후반부터 이루어진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는 삼국중 가장 밀접하게 진행되었으며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비조문화(飛鳥問化)로 꽃피웠다.
백제망명인과 후손들은 일본사회에 정착하면서 동화되어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이 백제왕씨 와 같은 혈통을 잇는 인물들이다.
백제는 일본(왜)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왕족 진손(辰孫), 곤지(昆支), 태자 아좌 (阿佐), 왕자 풍(豊 또는 豊璋)등을 왜에 파견하였다.
마지막 파견된 의자왕의 아들 풍은 백제부흥운동 시에 복신의 요청에 의해 본국으로 귀국, 그의 동생으로 전하는 선광(善光 또는 禪廣)은 왜에 남아 백제왕씨(百濟王氏)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 왕족의 후예 백제왕씨·대내씨·화씨(百濟王氏·大內氏·和氏)의 주요 인물과 백제 왕족 그 후예들은 일본 내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있었으며 역사의 중심에서 서서 일본에 끼친 영향 또한 매우 컸다.
다만 이들에 대한 기록이 단편적이면서도 때론 추상적이어서 좀 더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는 점과 일부 자료는 그 사료적 가치가 의문시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움이지만 우리 역사에서 자취를 감춤 백제왕족과 그 후예에 대한 기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하다고 볼수 있다.
앞으로 이러한 내용을 보다 심층적으로 다루어 백제사 복원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의자왕 후손 찾기
-양종국(공주대학교)
의자왕 후손들은 백제가 망한 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 3개국으로 흩어져 살았다. 자기나라를 잃고 타지에서 생활해야 하는 망명객의 외로움과 슬픔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신라 지배하의 의자왕 후손들이 자신들의 성씨까지 바꿔가며 숨죽여 지낸 것과 달리 흥미롭게도 중국과 일본에서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신분을 인정받으며 생활한 의자왕 후손들이 많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중 중국은 현재 13억이 넘는 거대한 인구속에서 그들의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에는 부여서씨,일본에는 삼송씨가 현재까지 뿌리를 이어오고 있다.
백제문화비에는 통일신라 이후 부여씨(扶餘氏)가 부여씨(夫余氏)로,다시 부여씨(夫余氏)가 서씨(徐氏)로 변했다는 설명이다.부여씨의 존재의미 자체가 무너져버린 사회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성씨까지 변형시켰으나 부여 서씨가 백제왕실에 대해 혈연적인 동질감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은 분명히 느낄수 있을 것이다.
백제문화의 우수성은 금동대향로, 왕흥사지출토사리감 등의 유물을 통해 증명되고 있고 특히 각종 문헌과 자료를 통해 증명되고 있는 국제성과 교류성에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백제는 중국과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백제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형성했고 이를 일본에 전해 일본문화의 근원을 이루도록 도왔다.
백제인이 일본 다자이후, 미사토죠 등에 도래해 상류 지식계층으로 활동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고, 중국의 의자왕의 후손들은 ‘부여태비묘지명’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당 황실과 관련되는 지배계층으로 활동했음이 입증되고 있다.
최근 우리의 역사 속에서 백제가 차지하는 의미를 되새기고 백제문화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정비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부여는 백제문화의 부흥기였던 사비시대의 123년간 도읍으로 백제문화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고장이다. 부여에서 고대 동아시아 교류왕국 백제와 관련된 중국과 일본의 관계자를 초빙해 고대 동아시아 문화발전의 선도 역활을 하였던 백제의 위상과 역활에 관한 국제학술포럼을 개최했다.
다음은 포럼 참가자들의 발제 내용.
◆중국 하남성 낙양에서 발견된 당대 백제인 묘지 개설
-자오전화(趙振華)(중국 하남성 낙양사범대학교 하락(河洛)문화연구센터)
고도 낙양은 개방의 매력과 포용의 가슴으로 타지역 외국인들을 도시와 마을에 모여들게 했으며, 중국 본토의 사람들과 이웃이 되어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였다.
당 고종 때 양경(兩京)은 백제유민을 안치한 중요한 지역으로, 그러한 내용은 문헌 사료와 출토 묘지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다.
이 외에 세계문화유산인 용문석굴의 당대 불상 제기에도 한반도 사람들의 종적을 볼 수 있으며, 이런 것은 신라 승려들이 만든 신라상감(新羅像龕) 뿐 아니라, 백제국 왕실 부여씨(扶餘氏)가 만든 상감도 있다.
낙양에서 부여융묘지(扶餘隆墓誌)의 출토된 후, 현재 묘지는 정주에, 덮개는 낙양에 소장돼 있다.
출토 시기와 지역에 대해서는 낙양출토석해시지기(洛陽出土石刻時地記)에 기록을 해 놓고 있지 않다.
부여융묘지는 출토된 후 하남성 개봉시에서 수년간 소장을 했다. 낙양의 역대 현장(縣長) 또한 수집한 묘지 등을 성으로 올려 보존하였다.
부여융묘지에는 영순원년(682년) 12월 24일 북망 청선리(淸善里)에 장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묘지의 출토 위치가 없고, 청선리는 낙양에서 출토된 수천기의 묘지 중 이것 하나만 보이기 때문에 청선리의 위치를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또, 청선리가 어느 향과 어느촌에 속해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묘지와 비교하여 연구하기도 매우 어렵다.
단지 낙양 성북의 망산(邙山) 위에서 장사지냈다는 것만 명확히 확인할 수가 있다. 현재는 단지 문헌사료에만 근거해 묘의 소재지를 찾을 수 밖에 없는데, 매우 곤란하다.
◆백제도래·의자왕의 후손 정가왕과 백제마을
-타바루 마사토(일본 원남 향촌)
백제 왕족의 신문(神門) 정착은 그 당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었을까.
왕족들의 인격과 식견을 접한 마을사람들은 한없는 존경과 동경심을 갖고 신처럼 모셨을 것이다. 비목신사(比木神社) 근처에는 복지왕의 묘라고 전하는 오륜석탑이 있다. 이 전설 내용은 천수년이라는 긴 세월에 가로막혀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정가왕(禎嘉王)의 가계도 역사적으로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전설을 증명이나 하듯이 친자대면 축제와 시와스 축제가 지금까지 연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것은 90㎞나 떨어져 있는 목성전(木城町) 비모신사에 모신 장남 복지왕이 1년에 한번 아버지 정가왕과 재회한다는 것이다.
순행할 때의 영체(靈體)를 후쿠로가미라고 부른다. 영체를 주머니 모양의 헝겊에 싸 장대 끝에 달아 왼쪽 어깨에 높게 내걸어 순행하는 작법을 완고하게 지키고 있다.
이것은 어여(御輿)에 영체를 옮겨 실어 순행하는 형태보다 한층 더 고풍스러운 양상을 전하는 것으로 일본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이 사주(師走) 축제는 그 후 문화청의 학술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일본 내에서도 매우 고식으로 남아 있는 예로써 기록보존 해야 할 문화재라는 국가 지정을 받았다.
또한 이 축제에는 고대 백제의 풍습이 남아 있다고들하여 한국에서 파견된 학술조시단도 찾아와 1996년에 '백제 왕족 전설의 수수께끼를 풀다'라는 제목으로 국제심포지엄을 남향촌(南鄕村)서 개최했다.
그리고 신예선사에는 백제왕족의 유품으로 전하는 보물로 아주 오래된 판자지붕 신전 등이 있다.
신전은 2000년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또한 왕의 묘로 전하는 후기 고분에 속하는 소형 원분(圓墳)도 존재한다.
관광시설에 대해서도 촌민이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1990년에 백제관을 개관하였다. 백제관은 한일우호의 심볼로 백제를 이미지한 건물로써 백제 왕궁터에 세워져 있던 객사를 실물크기 그대로 건축했다.
건축에 임해서는 한국 정부의 협력을 받아 도면을 빌리고 기와와 포석(鋪石)을 한국에서 들여왔다. 서까래와 대들보를 장식하는 단청은 한국의 단청 기술자 7명이 와서 솜씨를 발휘했다. 현판은 전 총리 김종필씨의 자필로 씌여져 있다.
◆일본 속의 백제왕족과 그 후예
-이다운(원광대학교 )
백제가 고대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러한 사실은 여런 문헌기록 뿐만이 아니라 고고학적 물적 증거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4세기 후반부터 이루어진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는 삼국중 가장 밀접하게 진행되었으며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비조문화(飛鳥問化)로 꽃피웠다.
백제망명인과 후손들은 일본사회에 정착하면서 동화되어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이 백제왕씨 와 같은 혈통을 잇는 인물들이다.
백제는 일본(왜)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왕족 진손(辰孫), 곤지(昆支), 태자 아좌 (阿佐), 왕자 풍(豊 또는 豊璋)등을 왜에 파견하였다.
마지막 파견된 의자왕의 아들 풍은 백제부흥운동 시에 복신의 요청에 의해 본국으로 귀국, 그의 동생으로 전하는 선광(善光 또는 禪廣)은 왜에 남아 백제왕씨(百濟王氏)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 왕족의 후예 백제왕씨·대내씨·화씨(百濟王氏·大內氏·和氏)의 주요 인물과 백제 왕족 그 후예들은 일본 내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있었으며 역사의 중심에서 서서 일본에 끼친 영향 또한 매우 컸다.
다만 이들에 대한 기록이 단편적이면서도 때론 추상적이어서 좀 더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는 점과 일부 자료는 그 사료적 가치가 의문시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움이지만 우리 역사에서 자취를 감춤 백제왕족과 그 후예에 대한 기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하다고 볼수 있다.
앞으로 이러한 내용을 보다 심층적으로 다루어 백제사 복원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의자왕 후손 찾기
-양종국(공주대학교)
의자왕 후손들은 백제가 망한 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 3개국으로 흩어져 살았다. 자기나라를 잃고 타지에서 생활해야 하는 망명객의 외로움과 슬픔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신라 지배하의 의자왕 후손들이 자신들의 성씨까지 바꿔가며 숨죽여 지낸 것과 달리 흥미롭게도 중국과 일본에서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신분을 인정받으며 생활한 의자왕 후손들이 많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중 중국은 현재 13억이 넘는 거대한 인구속에서 그들의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에는 부여서씨,일본에는 삼송씨가 현재까지 뿌리를 이어오고 있다.
백제문화비에는 통일신라 이후 부여씨(扶餘氏)가 부여씨(夫余氏)로,다시 부여씨(夫余氏)가 서씨(徐氏)로 변했다는 설명이다.부여씨의 존재의미 자체가 무너져버린 사회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성씨까지 변형시켰으나 부여 서씨가 백제왕실에 대해 혈연적인 동질감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은 분명히 느낄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