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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마애삼존불상
햇살을 한껏 머금은 마애불(磨崖佛)이 한 없이 인자한 모습으로 서 있다.
나무와 돌계단을 올라 마애불 앞에 서니 햇살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인자한 모습도 천차만별이다.
우리나라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백제의 미소로 불리고 있는 서산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호).
서산마애삼존불은 천진한 듯하면서도 한없는 사랑과 자비를 담은 표정이 일품으로 중앙에 석가여래입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미륵반가사유상, 왼쪽에는 제화갈라보살입상이 선명하게 조각돼 있다.
이는 왼쪽부터 과거, 현재, 미래를 나타내는 불로서 당대인들은 삼존불을 조각할 때 지난날의 보살핌과 오늘날 풍족한 삶에 대한 감사, 그리고 다가올 날에 대한 평안을 기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백제 불교미술이 절정을 이루던 사비시대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충청인의 넉넉한 성품을 고스란히 간직한 백제미술의 정수로 손꼽힌다.
▲보원사지
서산마애삼존불상을 보고 가야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보면 신라말기 절터의 고요함을 맛볼 수 있는 보원사지가 나온다.
건물이 존재하지도 않아 황량하기는 하지만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와 5층 석탑, 법인국사 보승탑과 탑비 등의 유적을 통해 절의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보원사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전기 사이인 것으로 추정되며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돼 백제 절일 가능성도 있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 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미뤄볼 때 당시엔 상당히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실제 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에서도 대형 사찰이었음이 속속 증명되고 있다.
▲개심사
개심사는 충남 4대 명찰로 꼽히는 백제시대의 사찰로 알려졌다.
가야산의 중심사찰인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인 654년 혜감국사가 창건하고,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 처능대사에 의해 중수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보물 제143호인 대웅전은 기단만 백제 때의 것이고 건물은 조선 성종 6년에 산불로 소실된 것을 성종 15년에 다시 중건했으며, 건축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보물인 영산회괘불탱과 금동여래좌상과 명부전 등의 문화유산도 만나볼 수 있다.
절 앞으로 길게 뻗은 연못 안의 나무다리를 건너 경내로 들어서면 개심사 특유의 아름다움이 눈 앞에 펼쳐진다.
여기에 해강 김규진이 전서체로 멋스러우면서도 장중하게 쓴 '상황산 개심사'라는 현판글씨도 범상치 않다.
명부전을 지나 왼쪽 산등성이 솔밭에 자리한 산신각까지 올라가면 개심사의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 멀리 서해까지 흐르는 산자락을 바라볼 수 있다.
▲해미읍성
개심사에서 자가용으로 5분 정도 가다보면 해미읍성이 나온다.
해미읍성은 태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해 세종 3년(1421)에 완성됐으며, 태종 14년(1414)부터 효종 2년(1651)까지 군사의 중심지였으며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부임해 근무하기도 했던 곳이다.
해미읍성은 고창의 모양성, 순천의 낙안읍성과 함께 원형이 잘 보존된 성으로 2㎞ 둘레의 성벽은 매우 훌륭한 산책코스다.
본래 해미읍성은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영, 즉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천주교 역사에서는 피의 순교사를 써 내려간 슬픔을 간직한 장소이기도 하다.
1866년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때 천주교도 1000여 명이 처형된 형장으로 이용됐다.
정문을 지나 성안으로 들어서면 60m 앞 정면에 커다란 고목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수령 300년이 넘은 이 나무가 바로 사형대로 사용됐다.
▲간월암
간월암은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 위치한 작은 암자로 조선 초 무학대사가 창건했으며, 송만공대사가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다른 암자와는 달리 간조 시에는 육지와 연결되고 만조시는 섬이 되는 신비로운 암자로 만조시에는 물위에 떠 있는 암자처럼 느껴진다.
밀물과 썰물은 6시간마다 바뀌면 주위 자연경관과 옛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고찰이 어우러져 관광객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서산=박계교 기자 antisofa@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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