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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바람'이 내기를 했다. 지나가는 나그네 옷을 벗기는 게임이었다. 바람이 먼저 나섰다. 휘휙~ 바람이 불자 나그네는 옷깃을 더 단단히 여몄다. 이번엔 해가 온기(溫氣)를 뿜었다. 그러자 나그네가 슬슬 외투를 벗기 시작했다. 힘만 믿고 불어댄 바람이, 서서히 내리쬔 해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강한 것보다 부드러움이 더 강할 수 있다는 이솝 우화 '해와 바람'의 얘기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모순이자 패착이다. '해'는 빛을 만듦과 동시에 그림자를 만든다. 어둠을 몰아내면서도, 어둠에 약하니 불완전한 존재다.
▶1998년 봄 햇살이 가득한 날, 영국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런던대에서 연설했다. 그는 '나그네의 두꺼운 외투를 벗게 한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라고 했다. 북한의 변화를 화해·협력정책에서 찾은 것이다. 이후 '햇살'은 강하게 퍼져나갔다. 금강산관광이 시작됐고 분단 55년 만에 첫 정상회담이 열렸다. 온기에 휩싸인 남북한은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2조원을 날름 받아먹은 북한은 4개월 뒤 장거리 미사일(백두산1호)를 쏘아 올렸다. 1차 핵실험도 했다. 이듬해부터는 강화도·여수 해안침투, 제1·2연평해전, 북핵확산방지조약 탈퇴, 잠수함 동해침투, 대포동 2호 발사를 강행했다. 아예 대놓고 까불었다. 결국 '햇살'과 바꾼 것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햇살'이 '햇살'을 유린했다.
▶(공치사지만) 금강산을 열어준 대가로 9800억을 줬다. 경수로 분담금도 4조원 가까이 냈다. 그것도 돈이 없어 할부로 집행했다. 식량도 250만t을 부쳐줬다. 여기에 낚인 미국(205만t)과 일본(100만t)도 양껏 지원했다.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이렇게 바친 돈이 3조2826억원이다.(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이후 더 퍼줬을 테니까) 이 돈은 북한 형제들이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길 바라는 염원 때문에 준 것이다. 그런데 인민의 존엄은 없었다. 김정일과 김정은 배만 불렸다. 그들은 주지육림에 돈을 썼고, 핵과 미사일을 만들었다. 겉만 비추는 햇볕이었다. (지금의 햇볕도 마찬가지다) 일부 대선주자는 '북한과 대화하자'고만 떠든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면 빌빌대면서, 사드 얘기만 나오면 난리를 치고 있다. 사드는 안 되고 북한 미사일은 되는가. 이런 매국도 없다.
▶트럼프의 '앵그리'가 차라리 낫다. 트럼프는 '북한이 우리를 가지고 놀았다'며 격분한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까불어대니 같잖은 것이다. 더 이상 어르고 달래면서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햇볕'으로 장난치는 조공외교·굴욕외교를 접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협박해서 돈 뜯어내고, 돈 떨어지면 다시 협박하는 건 깔본다는 뜻이다. 갖고 노는데 가만히 있으면 더 깔본다. '햇볕'은 날것이다. 부드럽지만 부러진다. 지금 필요한 건 햇볕이 아니라, 햇볕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