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후보가 한나라당 천막당사 시절 현판식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 ||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박근혜 당선인이 18대 대선의 고지에 올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서 의도치 않게 맺은 청와대와의 인연이 세월을 넘어 숙명이 된 순간이다.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정치인으로서 그녀의 삶은 역사의 수레바퀴와 함께 굴렀다.
어린 시절 청와대의 삶은 자연스레 정치 감각을 기르는 영양분이 됐다. 대한민국이 요동치는 1970년대,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피습으로 자의 반 타의 반 퍼스트레이디가 됐던 경험은 오늘날 그녀의 정치적 자산으로 남았다.
무엇보다 박 당선인은 한국 현대사에 깊은 흔적을 남긴 아버지로부터 정치적 유산과 역사적 평가라는 부채를 동시에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녀가 짊어진 과거 유산과 부채는 새로운 정치를 위한 하나의 씨앗으로 일궈졌다.
▲ 한나라당 시절 유세 강행중 때 손에 붕대를 감고 유세하는 모습. 연합뉴스 |
◆청와대와의 인연
박 당선인은 1952년 2월 2일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사이의 맏딸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거처를 옮긴 곳은 청와대였다. 당시 장충초등학교에 다녔던 그녀는 6년 내내 ‘수’와 ‘우’만 받는 모범생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도 줄곳 1등을 도맡는 등 대통령을 아버지로 둔 ‘엄친딸’로 곱게 자랐다.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한 뒤에도 수석졸업을 하는 등 그녀의 삶은 순탄했다.
▲ 한나라당 시절 대선에 앞서 경선시절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자리한 모습. 연합뉴스 |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하지만 얄궂게도 역사의 흐름은 그녀의 운명을 놔두지 않았다.
1974년 만 22세, 대학을 갓 졸업한 박근혜 당선인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피습으로 갑작스레 사망했다는 비보에 프랑스 유학을 접어야 했다. 무척이나 어린 시절, 청춘의 푸른 꿈을 뒤로한 채 어머니의 뒤를 이어 청와대 안 주인이 됐다.
어머니를 총탄에 잃고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대한민국 퍼스트레이디로서 안으로는 청와대 살림을 도맡고 밖으로는 대외 귀빈을 맞이하는 등 박정희 대통령을 보필했다. 그러나 운명은 박 당선인의 삶을 또다시 절망으로 내몰았다.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도 궁정동 안가에서 피습으로 세상을 떠나갔다. 한순간 퍼스트레이디에서 고아 신세로 전락했다. 급작스런 삶의 변화에 따라 그녀는 어린 동생과 함께 청와대를 떠나야만 했다. 절망의 시기였다.
▲ 2008년 1월 특사자격으로 중국 후진타오 주석을 만나 환담하는 모습. 연합뉴스 |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1998년, IMF 사태를 맞은 대한민국은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국민들의 희망은 땅으로 무너졌다. 70년대 일궈낸 경제성장의 기적이 거품처럼 꺼져갈 때 박 당선인은 정치에 입문했다.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달성군 제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뛰어든 그녀는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절박함과 “국민들의 어려운 삶을 해결해야겠다”는 신념이 정치 입문의 원동력이었다는 게 박 당선인의 고백이다.
정치 입문 이후 박 당선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과 여성 정치인이라는 조건으로 유권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 같은 조건 탓인지 그녀는 2000년 당 부총재를 거쳐 2002년 대선 후보로까지 물망에 오르는 정치적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주어진 조건을 뛰어넘어 그녀가 스스로 정치인으로 대중에게 신뢰의 이미지를 획득하고 정치 능력을 선보인 것은 2004년부터였다. 고(故)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던 2004년, 한나라당의 대통령 탄핵시도가 역풍을 맞고 ‘차떼기 사건’ 등 당의 신뢰가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녀는 유감없이 정치력을 발휘했다.
당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가운데 당 대표직을 맡아 이른바 ‘천막당사’에 들어가 새로운 정치를 약속하며 국민들의 돌아선 마음을 되돌렸다. 그 결과 17대 총선에서 10석도 건지지 못할 것이란 절망을 뒤엎고 121석을 얻는 기적을 만들었다.
선거의 여왕이란 칭호도 얻었다.
“국민과의 약속을 목숨만큼 소중히 생각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박 당선인의 회고와 같이 이때부터 그녀는 신뢰의 아이콘으로 국민에게 다가섰다.
2006년 5월 지방선거는 박 당선인의 저력을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로 기록됐다.
당시 그녀는 지방선거 유세 중 테러를 당해 얼굴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생명의 위협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수술한 직후 “대전은요”라는 한 마디로 선거 판세를 역전시키고 당 안팎의 견고한 신뢰를 얻게 됐다.
◆또 한 번의 위기를 딛고
2012년 한나라당은 또 한 번의 위기에 빠졌다. 당 대표를 둘러싼 돈 살포의혹과 최구식 수행비서의 디도스 공격 등으로 한나라당은 존폐위기에 처했다. 또다시 박 당선인은 난파선이 된 한나라당을 위한 구원투수로 나섰다.
전국을 돌며 그녀의 신발 밑창은 금세 다 닳았다. 많은 악수 탓인지 손에는 흰 붕대를 감아가며 거리유세를 이어 갔다. 박 당선인은 “집권여당으로서 국민의 아픈 곳을 보지 못하고 삶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것에 진심으로 사죄한다”며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쇄신에 들어갔다. 그 결과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새누리당이 150석 이상을 확보하며 제1여당의 자리를 견고히 지켰다.
신뢰받는 정치인으로 이미지를 굳히고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통해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던진 박 당선인은 지난 2002년 16대 대선 경선 출마 후 3수 만에 대선후보가 됐다. 2년 3개월 동안 제1야당을 탄탄하게 이끌어 온 대가였다.
하지만 대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박 당선자의 대권 도전은 쉽지만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운명은 박 당선인의 정체성과 역사관을 시험대에 오르게 했다. 보수와 진보의 치열한 논쟁도 일었다. 경쟁상대인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기세도 대단했다. 하지만 시대정신은 박 당선인을 선택했다. 그동안 박 당선인이 보여준 원칙과 신뢰의 정치가 국민이 원하는 새로운 보수의 가치로 인정받았다는 증거였다.
박재현 기자 gaemi@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