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대청마루와 따뜻한 온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남루하지 않은 멋이 있고, 비슷한 것 같아도 숨은 의미가 남다른 곳.

바로 수천 년을 우리 민족과 함께 해 온 한옥이다.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생활 터전이었던 한옥은 불과 100년도 안되는 사이 새로운 문명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갔다.

문명의 병, 물질의 병에 시달리다 새삼 그 가치를 깨달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콘크리트 뿐.

이제서야 사람들은 부랴부랴 한옥마을을 만든다며 부산을 떨지만, 겉이며 속이며 그 어색함이란….

이제 남아 있는 한옥은 '고택'이라 불리는 희귀한 존재가 됐다.충남 논산으로 그 귀한 존재를 찾아 고택 여행을 떠난다.

   
 
◆지혜가 숨겨 있는 한옥의 비밀

도착한 곳은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윤증고택.

이곳은 조선 후기 유학자 윤증의 집으로, 그의 호를 따 명재고택이라고도 부른다. 혹, 고택이라는 명칭에 선뜻 수십 칸 저택을 상상했다가 실제로 보고는 실망할지도 모른다.

작은 연못 건너 평범해 보이는 대문과 사랑채, 아담한 마당과 대청마루, 광채 등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러나 이곳은 마당의 돌 하나, 작은 창틀, 지붕 등 눈이 가는 곳이 모두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다.

윤증고택은 전형적인 입구(口) 형태의 한옥이다.

바깥 마당에서 고택을 올려다보면 대문보다도 사랑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담장도 없이 바깥 마당으로 이어지는 사랑채 구조는 마을 전체를 향해 열려 있는 모습이다. 윤증고택 곳곳에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 그것도 과학적 배경과 풍류가 어우러진 지혜가 곳곳에 숨어있다. 도착해서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곳이 사랑채 정면에 난 커다란 창틀이다. 언덕을 이용해 약간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랑채의 창틀은 놀랍게도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16 대 9, 즉 황금비율이다. 이 크기는 사람의 시야가 가장 좋은 비율이기도 하다. 밖에서 보는 사람들이 이 창틀을 보며 안정감과 시원함을 느끼듯, 사랑채에 앉아 저 창을 통해 보는 바깥 세상 또한 그렇다.

또 놀라운 것은 이 창틀 아래에 있는 작은 몇개의 돌들이다. 설명을 들으니 이 돌들은 선인들이 꾸민 금강산의 미니어처다. 이는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싶어도 멀어서 갈 수 없어 일부러 만든 것인데, 새벽에 사랑채 창을 열어 보면 마당의 연못에서 피어나는 물안개와 어우러져 금강산의 풍경을 그린 수묵화를 보는 것 같다고 한다.

   
 
◆고택에서 찾는 과학의 숨결

한옥의 마당은 나무는 고사하고 잔디조차 심지 않은 맨 땅이다. 여기에는 대청마루와 연계되는 놀라운 과학이 숨겨져 있다. 마당에 잔디를 심지 않은 것은 여름에 햇볕을 밭아 보다 빨리 가열시키기 위해서다.

대청마루 뒷 창문을 열어 놓으면 건물에 가려진 공간의 찬 공기가 마당으로 향하면서 대청마루에는 항상 시원한 바람이 불게 된다. 반대로 겨울에는 대청마루 뒷 창문을 닫아서 마당에 따뜻한 공기를 담아 놓는다.

또 다른 의미로는 마당의 나무는 입구(口) 모양에 나무목(木)이 있는 곤란할 곤(困)이 된다고도 한다.

안채를 돌아 광채가 있는 곳에도 재미있는 과학이 숨겨져 있다.

먼저 약간 비스듬해 보이는 두 건물의 지붕 각도가 신기하다.

이는 항상 신선함을 유지해야 하는 광채와 부엌의 특성을 고려해 당시 목수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두 건물의 지붕 강도와 높이를 서로 다르게 지어 계절에 따라 비치는 햇볕을 고려한 것이다.

또 일반적으로 두 건물의 간격이 같게 지어지는 것과 달리 이 곳은 뒷쪽으로 갈수록 좁아진다. 이것은 들어오는 바람이 폭이 달라지는 길을 통과하면서 선선함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통로는 일명 신비의 길로도 이미 유명한데, 남쪽에서 바라보면 갈수록 좁아지지만, 반대로 북쪽에서 바라보면 길의 폭이 똑같아 보이는 착시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 윤증고택 사랑채 앞에 놓여 있는 금강산 미니어쳐. 새벽 안개와 어우러지면 금강산을 보든 듯한 풍경을 연출한다고.
   
 

◆배려의 미덕이 있는 한옥

윤증고택의 아궁이 굴뚝은 키가 작다.

보릿고개 때 혹여 굴뚝의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면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더욱 힘들어 할까봐 배려한 것이다.

고택의 주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대대로 적극적으로 나서서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고 한다. 이 배려의 미덕은 두 번이나 닥친 소실의 위기에서 고택을 구하기도 했다.

한 번은 동학란 때다. 당시 동학군이 이 지방을 휩쓸며 탐관오리와 부잣집의 재산을 몰수하고 불태울 때 마을 주민들이 모두 나서서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동학군이 황급히 불을 껐다고 한다. 지금도 대들보에는 당시 불에 타다 만 자국이 남아 있다.

또 한 번은 한국전쟁 때다. 미 공군이 전술상의 이유로 윤증고택을 폭격 목표로 설정했는데, 당시 출격한 한국인 조종사가 마침 윤증고택의 은덕을 입은 사람이어서 폭탄을 일부러 다른 곳에 투하해 고택을 구했다고 한다.

윤증고택에 담겨 있는 세월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새 가을 해가 저문다. 노랗게 비추는 햇볕과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조화를 이룬다.

이 곳 윤증고택은 한옥 체험장소로 지정돼 숙박도 가능하다.군불때는 따뜻한 온돌방에서 옛날 이야기에 빠져들어 보자.

글·사진=이재형 기자 1800916@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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