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특별자치시 출범에 따라 ‘연기군’이 오는 7월1일자로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연기군의 역사와 인물, 가볼만곳 등을 살펴보며 대대손손 연기의 명맥이 유지될 수 있도록 연기군민이 아니 세종시민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연기군의 역사

△삼한시대

마한의 54개국 중 충남에는 15개국이 있었는데, 연기군과 인접한 곳에는 월지국(月支國 혹은 目支國-직산)·신운신국(臣雲新國-천안)·불운국(不雲國-공주 서부)이다. 이 중 연기군은 독자적인 행정구역을 형성하지 못하였으나, 이들에 흡수되어 행정력을 행사하는 영역에 속한 것은 사실이다.

△백제시대

백제시대 연기군은 백제의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긴 475년을 전후하여 연씨(燕氏)와 백제말기 전씨(全氏)가 활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훗날 두잉지현이 연기현으로, 구지현이 금지현으로 변했다가 전의현으로 불리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연기는 연씨들 즉 웅진초기에 활약했던 연신(燕信)과 연돌(燕突)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근거지로 추측할 수 있다. 연신과 연돌은 벼슬이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이르러 오늘날 국방장관에 올랐다. 비암사에서 출토된 백제말기 유물인 석불비상(石佛碑像)에 전씨가 주동이 되어 제작되었음이 명기되었고, 이는 계유년(673)에 제작된 것으로 백제유민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과 그곳의 지명이 전의·전동이란 것으로 보아 전씨 근거지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에 지금의 전의(全義)는 서원경(西原京)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대록군(大麓郡, 지금의 천안)의 영현(領縣)이었다. 대록군은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을 신라 경덕왕이 개명한 것이다. 대록군의 영현으로는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순치현(馴雉縣)으로 본래 백제의 감매현(甘買縣)을 경덕왕때 개명한 곳이며 지금의 천안지방에 해당한다. 또 하나의 영현은 금지현(金池縣)으로 본래 백제의 구지현(仇知縣)을 경덕왕때 개명한 것으로 지금의 전의(全義)에 해당한다.

연기(燕岐)는 통일신라시대에는 연산군(燕山郡)의 영현이었다. 연산군은 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을 신라 경덕왕이 개명한 것이다. 연산군 의 영현은 두 개 현인데, 하나는 연기현으로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을 경덕왕때 연기현으로 개명한 것으로 지금의 연기에 해당하며, 다른 하나는 매곡현(昧谷縣)을 경덕왕 때 개명한 것으로 지금의 회인(懷仁) 지방에 해당된다. 지금의 금남지역은 웅천주(熊川州)였는데, 757년(경덕왕 16) 웅주(熊州)로 개명하였다. 웅주는 오늘의 공주를 지칭하는 것이며, 금남은 그 일부이다.

△고려시대

연기군은 성종때 10도제가 실시되었을 때는 중원도(中原道), 지금의 충청북도에 속하였다. 5도양계(五道兩界)의 제도가 실시되면서 양광도(楊廣道-지금의 경기와 충청)에 속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지금의 연기군은 연기현과 전의현으로 청주(淸州)의 속현이었다.

연기현은 고려 현종(縣宗) 9년에 청주의 속현이 되었고 명종 2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으나 뒤에는 목천(木川) 감무가 겸하였다. 전의현은 신라 경덕왕때 금지현(金池縣)으로 개명한 것을 고려 때 전의로 고친 것이다. 금남은 통일신라시대 웅주(熊州)였다가 고려시대 공주(公州)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공주의 동쪽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연기군은 연기현과 전의현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금남지역은 공주로 연기군에 편입되어 있지 않았다. 연기현(燕岐縣)은 태종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태종 14년(1414년) 전의에 합쳐져서 전기현(全岐縣)이 되었다가 다시 태종 16년(1416년) 연기현으로 복설(復設)되어 조선시대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전의현은 태조 4년에 감무를 두었고 태종 13년에 현감을 두었으며 다음해에는 연기현을 합하여 전기현이 되었다가 태종 16년(1416년)에 연기현이 복설(復設)되면서 전의현이 되어서 조선시대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금남지역은 공주의 일부로 조선시대 후기까지 공주에 속하였다.

△일제시대~현재까지

한일합병 후에 일제는 1905년 연기군 북면 대부분이 조치원면으로 재편되고 나머지는 서면으로 넘어간다. 1911년 군청이 조치원으로 이동하고 1914년 일제의 중앙행정조직의 개편과 아울러 지방행정조직도 개편하였는데 4월 1일 연기군, 전의군, 공주군 일부를 연기군으로 통폐합 해 현재의 연기군을 형성하게 된다. 1920년 7월 북면의 일부를 조치원면에, 일부를 서면에 소속시켰다. 1931년 4월 조치원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1읍 6면이 되었다. 1940년 7월 서면의 반암·신동·내창·동리 등 4개리를 조치원읍에 편입시켰다.

1973년 7월 1일 공주군 장기면 나성리·송원리가 남면에, 반포면 도암리·성덕리·영곡리가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1986년 11월 1일 전의면에 소정(小井)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7년 1월 1일전동면의 신방리·영당리·양곡리·달전리·금사리·다방리가 전의면에 편입되고, 7월 1일에는 서면에 봉암(鳳巖)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95년 1월 1일 소정출장소가 면으로 승격했으며, 3월 1일 동면 갈산리가 충북 청원군 부용면으로, 청원군 강외면 심중리가 연기군 전동면에 편입되었고, 7월 1일에는 동면 문주리 일부가 서면 봉암리에 편입되었다. 2005년 3월 18일에는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되었다. 그리하여 연기군의 2063만평의 토지가 행정중심복합도시에 포함되고 2012년 7월 1일 세종특별자치시로 승격 된다.

■연기군의 인물

△임난수(林蘭秀·1342 ~ 1407)

임난수는 전라도 보안현(保安縣 : 현 전북 부안)에서 아버지 임숙(林淑)과 어머니 유씨(劉氏) 사이에서 1342년에 태어났다. 32세의 나이로 공민왕 23년 최영 장군과 함께 탐라를 정벌하여 큰 공을 세웠는데, 당시 오른쪽 팔을 적에게 잘리자 잘린 팔을 화살 통에 꽂고 계속 싸워 전승으로 이끌었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흥복도감(興福都監) 록사(錄事), 낭장(郎將)·호군(護軍) 등 11관(官)을 거치고 마지막으로 공조전서에 올랐으나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한 하늘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충청도 공주목 삼기촌(현 연기군 남면 양화리)에 낙향하여 생활하다가 1407년(태종 7) 6월 21일에 생애를 마감했다.

△성삼문(成三問·1418 ~ 1456)

조선 세조 때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이고,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2년 박팽년·신숙주·하위지·이석정 등과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한글의 창제를 위해 정음청(正音廳)에서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강희안·이개 등과 함께 요동(遼東)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건너가 음운 연구를 겸하여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 그 정확을 기한 끝에 1446년 9월 29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케 했다.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에는 1903년 성삼문을 제향한 문절사를 세웠으며 그 앞에 충신 명정현판이 걸려 있다. 연기지역은 성삼문의 출생지도 아니고, 생전에 머무른 적조차 없는 곳임에도 정려가 세워지게 된 것은 성삼문 사후 이 지역에 입향한 창녕성씨들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천붕(朴天鵬·1554 ~ 1592)

박천붕은 본관이 밀양으로 자는 익호(翼乎), 호는 규정이며, 1554년(명종 9) 충청도 연기현 북이면 두옥동(斗玉洞, 현 서면 월하리)에서 군수를 지낸 박령(朴笭)과 청주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봉(重峯) 조헌(1544~1592)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1571년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훈련원 참군이 되었다. 그의 나이 39세 되던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조헌의 종사관이 되어 8월 청주 상당산성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순국하였다. 방촌 황희(黃喜)의 후손인 황달효(黃達孝)의 딸 장수황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원겸, 인겸, 예겸, 의겸 네 아들을 두었다. 네아들은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의 종사관으로 상당산성에서 싸우다 모두 순절하였다. 그들의 충성을 기려 1897년 동면에 오부자충신문을 세웠다.

△오강표(吳剛杓·1843 ~ 1910)

본관이 보성(寶城)이고 자는 명여(明汝), 호는 무이재(無貳齋)로 1843년(헌종 9)에 공주군 사곡면 월가리 도덕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이른바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신하의 도리로 나라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어찌 살아 남을 수 있으랴." 하고 오적을 토주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고 청나라 상인으로부터 아편을 구해 공주향교 명륜당에 들어가 대성통곡한 뒤에 약을 먹었으나 반사(半死)의 지경에서 가까스로 소생하였다. 그 후부터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광사(狂士)라 하였다. 이후 오강표는 세상에 살 뜻이 없다 하여 명강산(明岡山 : 공주 무성산)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몸에는 항상 독약을 휴대하고 다녔다고 한다.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전해 듣자 그는 절명사(絶命辭)를 지어 선산과 스승 임헌회의 묘에 고유한 후 공주문묘(公州文廟)에 들어가 글을 벽에 붙이고 대성통곡한 후에 향교 안에 있는 강학루(講學樓)에 올라가 자결하였는데 이 때가 1910년 10월 16일이었다.

남면 갈운리에 그의 묘가 있고 비석이 세워져 있다. 또 공주산성 공원입구와 그가 태어난 사곡 월가리 도덕골에도 비가 세워져 있다.

△홍일섭(洪日燮·1878 ~ 1935)

연기군 서면 신대리에서 홍병규(洪秉揆)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호는 묵재이다.

1906년(광무 10) 8월에 장례원 주사(掌隷院 主事)로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36세 때인 1913년 8월 20일 일본의 폭정과 역신들의 위협에 공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홍일섭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사숙을 건립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1919년 3월 30일에는 42세의 나이로 조치원 장날을 이용하여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지휘하다가 검거되었다. 그때 체포된 수 십 명의 인사들은 다시는 만세를 부르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풀려 나왔지만, 유독 홍일섭만이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부하였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숙 경영의 후진양성을 통한 항일운동에 앞장섰다가 해방을 10년 앞둔 5월 14일, 5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광복이후 1978년 2월 26일 묵재 홍일섭 선생 기념사업협회가 발족되어 홍일섭 묘역과 유적의 정화와 기적비 건립 등 모든 사업을 완료하였다. 1983년 8월 31일에는 홍일섭이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제58050호)을 추서 받은 한편, 그의 유적은 1984년 5월 17일 지방문화재자료 제 46호로 지정되었다. 홍일섭은 1991년 12월 26일에는 건국훈장애족장(제2675호)을 추서 받았다.
 

황근하 기자 guesttt@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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