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 4경 백마강 일대 전경. 대전지방국토관리청 제공  
 

◆4경 구드레지구

비단물길 금강 자전거길 8경 중 3경 강경포구에서 4경 구드레지구까지 20.68㎞의 자전거길은 봄바람을 가르며 페달을 밟으면 1시간35분이 소요된다.

구드레지구는 구드레, 낙화암, 부소산성 등 옛 백제 유적을 활용, 다양한 축제공간과 더불어 인근 체육공원 주변으로 둔치숲을 조성해 지역 내 최대 규모의 테마초지군락을 만들었다. 이 일대는 삼국 중 가장 화려했던 백제의 문화수도, 사비이야기, 삼국시대 교역과 문물의 중심지였던 사비의 찬란한 문화유산 및 흔적을 따라가는 역사 테마루트이다.

부소산 낙화암을 굽이쳐 흐르는 금강의 비단물결은 꽃이 퇴적하는 구드레 나루에 당도하게 된다. 금빛 모래 위로 비단물결이 부서지고 낙화는 연화 문양으로 새롭게 태어날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고 있다. 떨어진 꽃잎은 연꽃을 이루고 황포돛을 타고 가다 눈을 지그시 감으면 마치 찬란했던 백제 문화의 비상을 꿈꾸는 듯하다.

 

   
▲ 금강4경 군수지구 일대 대전지방국토관리청 제공

백제시대 도성인 사비성의 관문 ‘구드레’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하며, 이 명칭은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하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됐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 그리고 다시 구드레로 변화해 구드레라는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백제를 오가는 왜의 배들이 구드레 나루터를 통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들어왔는데 왜에서 백제를 부를 때 ‘구다라’라고 부른 것은 ‘구드레’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구드레 나루를 건너 울성산 남쪽 기슭에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세운 왕흥사가 있고, 옛 문헌에 ‘사비의 강’으로 기록된 백마강이 부소산 기슭을 따라 흐르고 있다. 백마강 양쪽에는 왕흥사와 호함리절터, 부소산성, 부여나성을 비롯한 당시의 유적들이 많이 분포돼 있는데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소중한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부여라하면 한국민의 80% 이상이 백제의 수도였던 곳임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250여 개가 넘는 시·군 중 100여 년 이상 한 나라의 수도였던 곳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이다. 전국의 관광객이 부여를 찾아와 낙화암을 보고 국립부여박물관을 다녀간 사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처럼 잘 알려진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당나라 군대에 의해 멸망됐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부여는 백제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명칭이 바뀌지 않은 오랜 군으로서의 역사를 또하나 가지고 있다. 부여에는 왕궁지와 수많은 불교유적들, 왕릉유적, 그리고 부소산과 궁남지 등 발전했던 백제문화가 밀집돼 있다. 이 때문에 부여시대 백제로부터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았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기들의 문화 원류를 보기 위해 줄을 이어 찾아든다.

그러나 이곳에는 이 같이 화려한 백제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낙화암의 백제여인들이나 황산벌에서 산화한 한 맺힌 백제 최후를 지킨 영령들의 숨결도 함께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당연합군의 말발굽 아래 무참히 도륙당하고 치욕적인 굴복을 겪어야 했던 백제 최후의 현장인 부여.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부소산에 올라 백마강을 바라보며 백제의 애환을 노래한다.

 

   
▲ 석양에 물든 백제보 전경. 대전지방국토관리청 제공

◆5경 왕진나루·백제보

구드레지구에서 자전거로 51분(11.01㎞)을 달리면 5경 왕진나루가 눈앞에 펼쳐진다. 5경은 계백장군을 형상화한 백제보를 중심으로 둔치숲을 조성해 강~백제보~고수부지숲으로 연결되는 수려한 경관을 만들고 왕진나루 복원을 통한 다채로운 역사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계곡이나 수변가에 자생하던 느릅나무를 숲으로 조성해 청양 칠갑산 자락에서부터 뻗어 나오는 수려한 경관을 만들고 왕진나루 복원을 통한 다채로운 역사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금강은 웅진을 지나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로 흘러간다. 백제보를 만나 강의 흐름은 고요해지고 시간의 흐름도 늦어지듯 옛 부여의 기억은 물결 위로 퇴적된다. 찬란했던 백제 문화의 흔적과 부여 백제의 얼을 기리며, 비단물결은 찬란한 백제문화의 부활을 잉태한다. 부여군의 보는 백제의 수문장인 계백장군을 모티브로 한 디자인으로 부여의 수자원 확보를 위해 건립, 주요시설에는 소수력발전소, 어도, 공도교, 전망공간 등이 있다.

청양군 청남면과 부여군을 잇는 주요 교통로인 왕진나루는 ‘왕이 다녀간 나루’라는 뜻으로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와 공주의 삼각지점에 있어 사비성의 외곽나루로 붐볐을 것으로 추정된다. 35년 전 기와와 벽돌을 굽던 가마터가 발견되었는데 백제 때 부여 천도 무렵 기와를 구워 배로 수송했을 가능성이 크다.

금강은 청양군의 동쪽을 지나는데 이 부근 10여 개의 나루 중 가장 큰 나루였던 왕진나루는 지난 1980년대까지 청양군 청남면과 부여군을 잇는 주요 교통로였다. 1989년까지만 해도 부여와 교통을 잇는 수단으로 나룻배가 강 건너편의 부여까지 교통했으며, 정초에 마을 사람들이 선제를 지내던 곳이다. 일제시대에는 정산면과 목면, 청남면, 장평면 등의 쌀 공출이 왕진나루를 통해 이뤄졌고, 강경이나 군산에서 반나절 정도면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에 7~8월에는 제주도에서 새우젖배가 왕래하기도 했다.

백제보는 ‘지역 정체성을 확립하는 친환경적 백마강(금강) 살리기’를 설계의 기본으로 구성해 ‘백제의 향기가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금강) 백향유수(百香流水)’를 메인 테마로 표현했다. 슬로건으로는 ‘부활하는 역사의 강, 생명의 강 백마강 살리기’로 선정했다.

대상지와 연관된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해 백마강으로 가는 사비천도(성왕 16년에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수도 이전)를 스토리텔링을 통해 백마강을 통해 천도하는 것으로 구성했으며, 백마강을 지키기 위해 돌아온 계백장군 계백위환(階伯衛還)을 백제보의 가동보(수문) 테마로 말을 타고 백마강을 바라보는 계백장군을 형상화해 백제보가 이루는 치수·이수 개념을 수문장 이미지로 현대적으로 표현했다.

 

   
▲ 금강 6경 인근 유적지 공산성. 대전지방국토관리청 제공

◆6경 고마나루솔밭·공주보

금강 5경에서 6경까지는 1시간 55분(24.68㎞)이 걸린다. 6경은 웅진사, 공산성, 고마나루 국민관광단지 등 문화역사자원과 기존의 송림군락을 연계해 넓은 면적의 소나무 숲을 조성하고 동시에 공주보, 고마선착장, 고수부지숲을 중심으로 전통적 금강 모습을 재현해 대표적 문화체험 공간으로 재탄생됐다.

비단물결은 깊은 산림을 지나 백제의 옛도시 공주로 휘감아 돌아간다. 공산성의 깃발, 고마나루의 황포돛은 옛 정취를 자아내고 백제의 옛 숨결을 간직하며 비단물결에 나부낀다. 공주시의 보는 백제의 잃어버린 명성을 되찾은 역사 속 강국의 꿈을 이룬 무령왕의 부활을 꿈꾸며, 백제의 황제(무령왕)를 상징하는 ‘봉황’을 모티브로 디자인·제작됐다. 주요시설에는 소수력발전소, 어도, 공도교, 도로교, 유지관리교 등이 있다.

공주 고마나루는 공주지역 금강 및 연미산을 포함한 무령왕릉 서쪽으로 전개되는 낮은 구릉지대와 금강변 나루 일대로, 공주의 태동지이자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는 유서 깊은 명승지이다. 고마나루는 공주의 옛 지명으로서 ‘고마(固麻)’는 곰의 옛말이며, 한자로는 ‘웅진(熊津)’이라 표기한다.

이곳은 백제 문주왕이 웅진 천도 시 이용했던 교통로였고 660년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군인 소정방이 백제 공격을 위해 금강을 거슬러 와 주둔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했던 곳으로서 백제 역사의 중심무대이자 국제적 교통의 관문이었다. 또한 금강의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리던 웅진단(熊津壇) 터가 남아있는 등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국가의 제사 공간이었으며, 일반 서민들의 주요 생활터이자 수상교통로로서 민중의 정서와 애환이 짙게 서려있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이곳에는 처녀곰과 나무꾼 총각에 얽힌 아름답고도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현재 고마나루 북쪽에 솟은 연미산 중턱에는 전설 속 곰이 살았다는 곰굴이 고마나루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곰의 원한을 풀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나루터 인근에 곰사당을 건립하고 제사를 기원했다. 고마나루는 백제 역사의 중심에 있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클 뿐 아니라 금강변에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450여주의 마을 솔밭이 금강 및 연미산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는 곳으로, 역사 문화적·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경승지로 평가된다.

박한진 기자 adhj79@cctoday.co.kr

Posted by 충투 기자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