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횃불운동을 주도했던 조동식 선생.  
 

지금으로부터 93년 전 1919년 3월 23일 밤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 산마루에서 횃불이 피어올랐다. 이 횃불은 인근 옥산면, 남이면 등으로 들불처럼 번졌고 횃불 아래서 주민들은 ‘대한독립만세’를 목놓아 외쳤다.

횃불시위는 3일에 걸쳐 지속되면서 인근 충남 연기, 경기도 까지 확산됐다. 이에 일제는 청주와 조치원의 경찰·헌병수비대를 동원해 총기를 휘두르며 시위를 제지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30일 밤 다시 부용면에서 횃불시위가 전개됐고 4월 1일까지 이어졌다. 도합 8개면, 청주의 서북쪽 대부분이 독립을 갈망하는 만세소리로 진동했다.

횃불운동을 최초로 주동했던 이 고장 출신 조동식(1893~1949) 선생은 이 사건으로 2년의 옥고를 치르고 192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했다.

고향에 내려왔지만 더 악랄해진 일제의 감시로 중국으로 망명, 장사를 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45년 해방 후 맏손자와 함께 고향땅을 밟았다. 1977년에는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하지만 조 선생은 오랫동안 독립운동사에 당당히 오르지 못했다.

중국에 남아 있던 손자가 중공군 장교로 6·25에 참전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손자가 나중에 인민해방군 상장을 거쳐 중국 최고 정책자문기구인 ‘전국 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1998∼2003년)까지 오른 조남기(86)다. 당시에는 중국과 수교도 이뤄지지 않았고 반공정권 때문에 공산당원을 후손으로 둔 조 선생의 공적은 인정되지 않았다.

가족들도 1970년대까지 ‘연좌제’로 고통을 받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조 선생의 증손자인 조흥연(66)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을 봤는데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낙방했다”며 “1984년에야 작은아버지가 중국군 장군이 됐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회상했다. 조 씨는 “냉전 논리 때문에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이 뒤늦게 인정받았지만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우리의 아픈 역사 현실”이라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 중국과의 수교, 이데올로기 갈등이 점차 사라지자 조 선생의 공적이 새롭게 평가됐고 1990년 뒤늦게 서야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조흥연 씨도 정부의 요청에 따라 1987∼1990년 중국을 자주 왕래하며 삼촌인 조 전 부주석과 정부 인사를 연결하는 일을 했다. 조 씨는 이때 중국에 건너가 사업 등을 하다가 귀향했다. 3년 전부터 매년 3·1절이면 후손들과 함께 조 선생의 묘소 앞에서 추모식을 갖고 있다.

이런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조방형 전 청원군의회 의장이 강내면 민간단체 대표들에게 조 선생 추모행사를 제안했고, 지난 10일 추모위원회까지 결성됐다. 강내면 주민으로 구성된 ‘조동식 선생 추모위원회’는 1일 태성리 마을 뒷산에 있는 조 선생 묘소 앞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봉화시위를 재현할 계획이다.

3·1절을 맞아 청주보훈지청(지청장 구을회)도 다채로운 시민참여 행사를 마련해 보훈의식을 고취할 계획이다. 오전 11시 청주예술의 전당에서 3·1절 기념식을 시작으로 청원군 북이면 손병희선생 유허지에서는 기념식 및 택견한마당 행사가 열린다.

또 시간적 제약으로 국립묘지를 방문하지 못하는 유가족 및 일반인들을 위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는 사이버 참배를 진행한다. 참여는 청주보훈지청 블로그(http://blog.naver.com/jich25)를 방문하면 누구나, 헌화, 분향 등 참배 할 수 있다.

김용언 기자 whenikiss@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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