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대 대선 직전,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이명박 후보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이 후보가 서울 청구동 JP 자택을 찾은 자리에서 선대위 명예고문직을 수락하고 한나라당에도 입당했다. 그는 며칠 후 고향인 부여로 달려가 이 후보 지원유세를 펼쳤다. 반면 심대평 국민중심당 대표가 밀고 있었던 당시 이회창 후보(무소속)에게는 비판의 칼날을 곧추 세웠다. '제2의 자민련 돌풍'을 꿈꾸던 국민중심당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 그러던 JP가 엊그제 새누리당(옛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심대평 자유선진당 대표와 만나 오찬을 함께 했다. 심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다. 그의 새누리당 탈당 소식이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그동안 JP 주변에선 이 대통령에 대한 불만 등 이런저런 얘기가 흘러 나왔던 터였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에 대한 JP의 서운한 감정도 한 몫 했다는 설이 나돌았다.

JP는 박 위원장의 사촌 형부다. 그리 멀지 않은 인척관계다. 하지만 두 사람의 정치 성향은 애초부터 엇갈리고 있다. 세종시 문제에서도 그 차이가 현격하게 드러났다. 박 위원장이 세종시 원안을 줄곧 주장한 데 비해 JP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JP는 정운찬 당시 총리와 만나 세종시 수정론에 힘을 보탰다. 충청지역 정서와는 정면으로 상반된 것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를 관통한 이른바 '3김' 정치의 장본인이다. 김영삼·김대중 두 사람은 대통령을 역임했지만 JP만은 '2인자'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자타가 공인하는 '정치 9단'이다. JP 자신도 기회가 있을 적마다 "정계에 몸담으면서 사람 보는 눈을 갖고 있다"며 '킹메이커' 기질을 자랑하곤 했다.

적어도 그 당시엔 JP가 손들어주는 사람이 대권을 잡을 수 있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3당 합당을 통해 김영삼 정권을, 1997년엔 DJP 연합을 통해 김대중 정권을 각각 탄생시켰다. 1997년부터 대통령 선거에 내리 3차례 낙선한 이회창 전 대표 입장에서 보면 '최악의 선택'인 셈이다. 캐스팅 보트를 쥔 JP의 정치적 영향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충청권 민심의 전폭적인 지지세에 힘입은 바 크다.

비록 한 때였지만 자민련이 국회의원 의석 55석을 달성한 기록도 갖고 있다. 충청권 '녹색 바람'이 경기, 대구·경북, 강원 등지로 확산되면서 전국 정당화의 단초를 마련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민심에 둔감한 자민련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JP는 2004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1번의 벽조차 넘지 못해 끝내 정계를 은퇴하고야 말았다. 자민련의 정통성은 현재 그 어디서도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2006년 한나라당에 흡수 통합됐다는 건 아이러니다.

이를 지켜본 충청 지역민으로선 만감이 교차한다. 영·호남의 강고한 지역주의 틈바구니에서 충청 지역민이 겪는 고통이 상대적으로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JP를 통해 그런 충청 정서가 표출됐다고 보는 게 맞다. 싫더라도 충청지역 정당에 표를 찍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가 있었으나 이젠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시대적인 가치, 더 나아가서는 시대변화를 주도할만한 내적 역량을 중시하는 인물·정당만이 살아남는다.

그는 요즘에도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는 맥아더 장군의 고별사를 자주 인용한다. 사라지는 준비를 하는 것에 불과하니 자신의 행보에 대해 너무 괘념치 말라는 말도 덧붙인다. 그의 '대낮 촛불론'이나 '석양론'과도 맥이 닿아 있다. “동쪽에 떠오르는 해도 아름답지만 정말 아름다운 건 석양을 물들이는 노을이다” 다분히 감상적인 표현이다.

이제 그의 나이도 86세다. 요즘 어딜 가나 대접 받는 원로가 드물다. 훈수정치를 하기가 버거워 보인다. 잘못하다간 노욕(老慾)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속칭 '꼰대', '뒷골목 권력' 취급을 받는다. 모름지기 개인의 욕심 따위는 금물이다. 한마디 말이라도 지역민과 함께 할 수 있는 진정성과 대의명분이 그 첫 번째 덕목이다. '충청권 대표 원로 정치인' 이름값을 끝까지 지킬 것인지 주시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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