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 곳곳에 자리 잡은 미술관들도 많지만 ‘청록산수' '바보산수' 등 독자적인 화풍으로 한 세기를 풍미한 거장 김기창의 작품세계를 엿볼수 있는 충북 청원군 '운보의 집'도 나들이 코스로 추천할만하다. 이승동 기자

지역 곳곳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미술관들은 훌륭한 주말 여행 코스로 손색이 없다.

더군다나 여행과 함께 주어지는 미술품 감상은 바쁜 현대인들이 동경하는 '느림'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나른한 주말 가까운 미술관에 들러보는 것은 어떨까.

여행 길목 혹은 데이트 코스로 들를 만한 전원 속 미술관은 아마도 일상에 지친 도시인들에게 생각치 못한 휴식을 제공해 줄수 있을 듯 싶다.

그렇다면 이번주 ‘금토일’에서는 ‘청록산수' '바보산수' 등 독자적인 화풍으로 한 세기를 풍미한 거장 운보 김기창의 작품세계를 엿볼수 있는 곳을 소개한다. 운보가 말년을 보낸 충북 청원군 '운보의 집' 일부를 미술관으로 꾸며 놓은 곳. 이번주 주말 여행 추천지는 바로 운보의 집이다. 

   
▲ 운보 김기창 화백.

◆ 운보의 흔적을 느끼다

운보 김기창. 이름만 들어도 단번에 알 수 있는 현대 화단의 대가이자, 장애를 이겨낸 인간 승리의 모델이다. 운보 김기창은 '운보의집'이라는 문화 공간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떠났다. 운보의 바람에 부응하는 듯, 매년 10만여 명이 이곳을 찾는다. 3만여 평의 부지에 깨끗하게 정리돼 있는 건물에는 아직도 운보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운보 김기창은 부인 우향 박래향을 떠나보낸 후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에 내려왔다. 어머니의 고향인 이곳에 내려와 그 동안 사둔 땅을 다지기 시작했다. 1979년 혼자 기거하면서 하나하나 돌을 쌓고, 길을 닦고 하면서 문화 공간을 만들었다. 현재 이곳에는 운보 김기창 화백이 살던 '운보의집'과 '운보미술관', '운보공방', '분재원', '갤러리', '도예교실', '야외 자연석 공원' 등이 마련돼 있다. 그래서인지 운보의집은 평소에도 CF, 드라마, 웨딩 사진 촬영지로 사랑받고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 ‘운보의 집’은 가면 갈수록 새로운 곳이다. 

     
▲ 운보화실(작업실)에 있는 운보의 유품들과 작품.

◆ 그 곳에 가면

운보의 집은 충청권 어느 곳에서도 2시간이면 닿을 수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다. 운보의 집에 당도하게되면 생각과 달리 그다지 작품 설명은 필요 없어진다. 운치 있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한옥, 소나무 앞의 너럭바위, 생김새가 제각각인 수석 등을 보면 호탕하고 자신감 넘치는 한국의 정서를 담아낸 그의 작품 세계를 직감적으로 납득하게 된다. 특히 빼어난 경관에다 아기자기하게 가꿔져있는 수풀들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어 어디를 가나 상쾌한 바람, 푸른 숲이 지천이다. 그래서인지 가족 나들이는 물론 연인들이 데이트를 즐기기에는 '딱'이다. 그야말로 고품격 나들이를 제대로 즐길수 있는 최적의 장소.

구석 구석이 미술작품들로 꾸며진 이곳 길을 걷다보면 이 만한 휴식이 또 어디 있을까하는 행복감이 느껴진다. 걷다 지치면 주변 운보의 집 미술관에 들러 그가 남긴 작품을 마음 껏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은 이 곳의 최대 메리트다.

특히 그가 신던 고무신부터 생전 아꼈던 각종 미술도구들까지 전시돼 있어 당대 최고 화가의 숨결까지 온몸으로 느낄수 있다. 

   
▲ 조국통일 / 화선지에 채색 / 1972년

◆ 운보 김기창 화백은

운보 김기창 화백은 왕성한 실험정신으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변신을 거듭한 한국화단의 거목이다. 타고난 예술혼과 활화산같은 창작열로 호평받았고, 청각 장애로 인한 침묵의 고통을 딛고 우뚝선 의지의 인물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914년 서울 운니동에서 태어난 김씨는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한 7세 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신경이 마비돼 후천성 귀머거리(전농)가 됐다. 한국 전쟁때는 피난지 군산에서 조선시대 한국인의 모습으로 예수의 일대기를 그린 ‘성화’ 연작을 2년에 걸쳐 제작했다.

전통 한국화의 평면구성에서 탈피해 입체 구성의 ‘노점’, ‘구멍가게’ 등 대표작을 제작, 입체파 선두로 나선 것도 이때였다.

야생마의 움직임이 격정적 구도로 나타나는 대작 ‘군마도’와 전통 가면극을 작품화한 ‘탈춤’ 등 춤 연작으로 힘찬 운필을 구사했다.

이 밖에 1000여 마리의 참새 떼가 양편에서 날아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담은대작 ‘군작’은 운보의 표현적 특징과 스케일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60년대 들어 해외 화단에 나선 운보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가장 뚜렷한 변화를보이는 완전추상 ‘태고의 이미지’, ‘청자의 이미지’ 등 이미지 연작으로 한국화의새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어 적색, 황색이 주를 이루는 ‘태양을 먹은새’ 등을 발표하는 등 천변만화하는 작품세계를 과시했다. 또한 장식적 산수화 ‘청록산수’를 선보이고, 민화풍 산수화인 ‘바보산수’와 해학성이 돋보인 ‘장생도’를 차례로 발표해 호평받았다.

그러나 수차례 부부전을 가진 화업의 친구이자 인생의 반려인 부인이 1976년 타계하자 그는 말할 수 없는 허탈에 빠졌다. 일생에서 가장 활발한 작업을 했던 게 바로 그 이후로, 공백을 메우고자 하는 그의 안간힘을 느끼게 한다.

아내를 기려 성북동에 운향미술관을 세운 그는 성화집 ‘예수의 생애’ 발간을 기념해 예수생애 연작으로 '운보 김기창 성화전'을 갖는 등 미친듯이 화면에 빠져들었고, ‘심상’ 연작을 내놓기도 했다. 거구였던 운보는 79세 때 심장질환으로 쓰러졌다 기적적으로 원기를 회복하는 등 말년에 건강문제로 고생을 했다.

그러다 지난 1996년 후소회 창립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뒤 뇌출혈 증세를 보이며 더이상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2001년 생을 마감했다.

이승동 기자 dong79@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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