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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보은 삼년산성이 1500년 전 성벽을 그대로 간직한 채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충북도는 삼년산성을 비롯, 충북지역 7개 산성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추진중이다. 이형규 기자 |
신라 자비왕은 470년 보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오정산(해발 325m)에 삼년산성(三年山城·사적 235호)을 세웠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년산성이라는 이름은 성을 짓기 시작한지 3년 만에 완공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은 한반도 3000여 개의 산성중 단 한 번도 침략을 당하지 않았다.
충북도는 유서 깊은 보은 삼년산성과 청주 상당산성·충주산성·제천 덕주산성·충주 장미산성, 단양 온달산성, 괴산 미륵산성 등 7개 산성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추진 중이다.
삼년산성은 1500년 전의 성벽을 그대로 유지한 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또 지난해부터 대장장이 체험을 들여와 토요일 상설체험이 가능토록 했다. 머지않아 세계문화유산이 될 삼년산성에서 반나절동안 대장장이가 돼봤다.
◆1500년 전 전운은 사라졌다
신라가 수도 경주가 아닌 곳에 '철옹성'을 쌓은 이유는 간단하다. 고구려의 남침을 막고 백제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다. 당시 보은을 통하지 않고선 영남으로 남하할 수 없고, 이북으로 진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당시의 전쟁은 성을 교두보로 이루어져 삼국은 성을 축조하는 일에 혈안이 돼 있었다.
성이 축조된 지 84년 후인 554년, 성의 위력을 발휘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삼년산성 출신 무명장수가 백제 성왕(聖王, 재위 523~554)의 의 목을 벤 것이다.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 장군은 장수 도도(都刀)를 불러 신라의 접경지에 투입했다. 마침 백제 성왕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구천(狗川·현재의 옥천)부근에 당도했다.
도도는 매복을 하고 있다가 성왕의 목을 베고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후 신라는 3만 백제군사 중 2만 9600명의 목을 베고 제1품 좌평(佐平) 4명의 목숨을 앗아 대승을 맞았다. 이로 인해 신라는 한강유역의 진출이 용이해졌다. 또한 이 사건을 기틀로 서해안 진출을 꾀해 중국과의 직접교역에 나섰다.
신라가 성의 위력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한 적도 있다. 660년 김유신은 백제의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당시 태종 무열왕은 당나라 황제의 교시 전달식을 자국 영토 내 삼년산성에서 치렀다. 보통 이런 국제행사는 자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승전지에서 여는 게 관례임에도 말이다. 아마도 당나라 황제의 사자에게 견고한 성을 보여 신라를 얕보지 말라는 일종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함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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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아침 동네뒷산 높이의 오정산에 올랐다. 매주 토요일 9시부터 대장장이 체험이 예정돼 있어 서둘러야 했다. 산은 높지 않지만 급경사다.
그러기를 20여 분 판판한 돌로 쌓은 거대한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성벽높이는 13~22m, 총 길이 1680m, 폭은 말 두필이 지날 정도인 7~8m에 이른다. 주 출입구인 서문에 당도하자 성 한가운데 천막으로 지은 체험장에서 준비가 한창이다. 유동열 보은대장간 전수자가 "준비가 덜 됐으니 성을 한번 둘러보라"며 손을 바삐 움직인다.
서문에서 남문, 동문과 북문으로 이어지는 트래킹 코스에 올랐다. 각 문은 각기 다른 특징을 갖고 있지만 수비에 중점을 뒀다는 점은 동일하다. 서문은 주 출입구로 현재는 주춧돌로 당시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 삼년산성의 서문은 안에서 밖으로 열린다. 우리나라 어느 성에도 이런 형태의 문은 없다. 적이 입성하려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게다가 서문의 좌우측 성벽에 곡성(치성)을 만들어 초병이 적을 발견하고 공격하게 만들었다. 서문 앞에 쌓여있는 무너진 돌무더기는 옹성의 흔적이다. 옹성은 성을 지키기 위한 성이다. 적이 서문으로 진입할 때 서문과 옹성에서 동시에 공격이 가능하다. 신라인들은 길과 저수지를 이용해 이중, 삼중의 방어막을 구축했다. 40여 년 전만 해도 성은 오솔길로 통행했다. 다수의 군사가 진입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적은 관문을 뚫고 온다고 해도 성문 바로 앞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미지'라는 저수지로 빠지게 된다.
성벽을 따라 길을 오르면 보은 전경이 바라보이는 남문이다. 남문의 밖은 절벽이다. 이 문은 창문형 문으로 5m가 넘는 사다리가 있어야만 접근이 가능하다. 남문은 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선 맑은 날엔 보은 전체가 내려다보이고 멀리 백제의 노고산성도 눈에 닿는다.
여기서 다시 20여 분을 걸으면 무너진 성벽이 보인다. 현재 복원 작업 때문에 출입을 금하고 있는 동문이다. 굴삭기 등 중장비와 번호표가 붙은 복원용 석재 무더기를 문 대신 볼 수 있다.
이제부터 오르막이다. 20분을 더 북진하면 북문이 나온다. 'ㄹ'자 석축을 쌓아 작은 미로를 만들었다. 이렇게 성벽을 따라 걷는 데만도 1시간 30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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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규 기자가 대장장이 체험장에서 목걸이를 만들고 있다. |
◆정신없이 내리쳐 만든 목걸이
성을 한 바퀴 돌아 내려오니 화덕에 불이 붙었다. 대장장이 유 씨는 연신 풀무질을 하고 있었다.
유 씨가 시범을 보였다. 손가락만한 쇠붙이를 화덕에 넣고 달궈졌을 때 꺼내 비틀고 두들겨 원하는 모양을 잡기만 하면 그만이다. 적잖이 실망했다. 도착하기 전 '호미정도는 만들어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 때문에… 유 씨는 "호미를 만들 수 있으면 대장간을 차려도 될 것"이라며 "일단 해보고 그런 말을 하라"고 채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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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7㎝정도의 목걸이다. 기자는 부모님과 본인의 띠를 도장으로 새겼다. 체험을 마치자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선무당인 것을 티라도 내듯 팔 군데군데 덴 자국도 보였다.
그 옛날 성을 감쌌던 전운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15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한가로이 망촛대 바람에 흔들리는 성안에는 관광객들의 어설픈 담금질 소리와 망치질 소리가 웃음소리와 뒤섞여 울린다. 분쟁의 흔적이 평화로움으로 옷을 갈아입은 곳. 재차 이곳을 방문할 때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푯말이 꽂혀 쇳소리와 성벽에 기운을 불어 넣었으면 한다.
삼년산성(보은)=이형규 기자 knife4026@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