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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가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 위 학살의 현장을 무심하게 달리고 있다. 취재팀은 뜨문뜨문 지나가는 이 열차를 찍기 위해 1시간 넘게 진을 치고 있어야만 했다. 쌍굴 뒤편 ‘노근리사건 희생자 위령비’를 보러갔던 정진영 기자가 ‘똑딱이 디카’로 찍었다. 현재 쌍굴다리 탄흔 복원공사(사진 아래)가 한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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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굴(窟)이 있다. 위로는 기차가 다니고 아래로는 사람들이 다닌다. 사람과 기차를 품고 있는 터널은 아주 무표정하고 시니컬하다. 하지만 사연을 캐묻지 않아도 수백발의 탄흔을 보면 전쟁의 포화가 스쳐지나간 곳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철도 쌍굴다리. 길이 24.5m, 높이 12.25m의 쌍굴엔 영문도 모른 채 스러져간 넋들이 포자처럼 흩날리고 있다. 누가 이 참혹한 상흔을 남겼을까. 당연히 전쟁을 일으킨 인민군이 원흉이어야만 권선징악의 얼개에 맞는다. 끝내는 선(善)이 승리하고 악이 징계된다는 '착한 귀결'. 하지만 인과응보의 가해자는 다름 아닌 ‘영원한 우방’ 미국이다. 6·25전쟁 61주년,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61주년. 그 비극의 현장을 찾았을 때 하늘은 너무도 파랗게 '노명(露命)의 시간'을 묵도하고 있었다.
◆잊혀져가는 이야기
1950년 7월 25일. 충북 영동 노근리 사람들은 전쟁이 났어도 여전히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입버릇처럼 '여기까지 무슨 일이 있을라고'하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개령(疏開令)이 함락되자 생각이 달라졌다.
모두들 부랴부랴 피난 봇짐을 쌌다. 달구지에 솥을 싣고, 옷가지와 낟알기를 주섬주섬 챙긴 후 길을 나섰다. 소꿉놀이를 하던 아이들도 어미의 손에 이끌려 남쪽으로 향했다. 이들의 피난길을 유도한 사람들은 미군들이었다. 이날 저녁 피난민 500~600명은 하가리 하천에서 노숙했다. 날이 밝자 미군은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 피난민들을 철로로 유도했다. 이때 군용기의 굉음이 개근철교(쌍굴) 위를 뒤흔들며 지나갔다.
당시 미군은 작전정보가 뒤엉켜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누가 북한군인지, 국군인지, 누가 민간인인지 피아식별을 하지 못했다. 북한군이 농민 옷차림으로 위장, 피난민 대열을 통해 미군 방어선을 침투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미군은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들을 적으로 간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쌍굴다리 인근에 피신하고 있던 300여명은 숨을 죽이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미군 공군기(F-86F·세이버전투기)가 하늘을 한바퀴 선회하더니 비질하듯이 기총소사를 시작됐다. 여자와 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흙더미와 자갈이 마구 떨어져나갔으며, 달구지는 불에 타고 시체와 죽은 소들이 사방에 널브러졌다. 피범벅이 되어 죽어가는 어머니의 주검에 아이들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미군들은 달아나는 사람을 쫓아가서 사살했다. 피살된 인원이 자그마치 300여 명이다. 그 주검 중에 북한군은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던 그 ‘두려움’은 아직도 콘크리트 다리에 총탄 자국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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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역사
노근리는 굴봉 자락이 마을을 감싸안고 서송원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노근(녹은), 목화실(목화곡), 안화리(안대) 등이 있다. 노근은 사슴이 숨어 있는 부락이라 하여 녹은(鹿隱)이라 부르다가, 일제 강점기 때 이름이 너무 어렵다해서 노근(老斤)이라 개칭했다. 하지만 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동네는 아직도 60년 전의 상처를 잊지 못하고 있다.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은 날이 같기 때문에 집집마다 '떼제사'를 지내며 울칩(鬱蟄)하고 있다.
이 사건이 외부에 처음 드러난 것은 1960년 민주당 정권 때 유족들이 미군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하면서였다. 당시 미군측은 소청을 기각했고 이 사건은 그대로 역사의 미궁 속에 묻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4년 4월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은용이 유족들의 비극을 담은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록을 출간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99년 9월 AP통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10월 주한미군 현지조사가 있었다.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오인사격으로만 밀어붙이던 정부도 2000년 한·미 합동조사를 실시, 원통하게 죽어간 그들의 역사를 인정했다. 전쟁은 체제와 이념, 국가권력의 무력충돌이지만, 그 상처와 흉터는 영원히 남는다. 절대폭력 앞에서 이성과 감성이 완전히 무용(無用)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노근리 평화공원은 옛 노송초등학교 일원 13만 2240㎡ 부지에 총사업비 191억 원을 들여 위령탑(추모의 비), 평화기념관(1509㎡), 교육관(청소년문화의 집·2046㎡)과 상징조형물을 조성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도 개봉됐다.
함부로 쓰기도 두려운 '학살'이라는 말이 귓전에서 아프게 저며 온다. 전쟁이 무엇을 남겼는지 우리는 노근리의 슬픈 표정만 보더라도 가히 복기(復碁)할 수 있다. 충북지역에서는 6·25전쟁 때 영동 노근리사건을 비롯한 단양 곡계굴사건, 오창 보도연맹사건, 청원 분터골사건 등으로 7000명 넘는 민간인이 학살됐다.
노근리(황간면)=나재필 기자 najepil@cctoday.co.kr
영동=배은식 기자 dkekal23@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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