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도 배추지만 후작이 늦어져 더 큰 걱정이여. 수박농사까지 망치면 큰일인디 말여.”
12일 오전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시설재배단지 중 한 곳인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
궂은비가 내리고 있지만 손해를 보면서까지 늦게라도 남은 봄배추를 시장에 팔기 위해 대형트럭에 실어 나르는 농민들과 상인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예년 같으면 어린 수박 모종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야 할 비닐하우스 1500여 동 중 상당수는 여전히 자리를 뜨지 못한 봄배추가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래저래 힘없는 농민들만 고달프다. 지난해 배추 값이 폭등하면서 ‘대박’의 기대를 품고 계약재배로 몰려든 상인들이 봄배추 가격이 1망(3포기)에 1000원대로 급락하자 출하를 미루거나 수확을 포기하면서 이들과 계약을 맺었던 농민들은 후작도 준비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이곳 비닐하우스 60여 동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오모(77세) 씨는 “벌써 비닐하우스를 비우고 후작 채비를 마쳤어야 했는데 4월 말까지 배추를 뽑아가기로 약속한 상인들이 가격이 폭락하니 도무지 배추를 가져가질 않아 큰 문제”라며 “농민들이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되레 잔금을 깎아주고 후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상인들과 하우스 1동당 300만 원 안팎의 가격으로 배추재배 계약을 맺은 농민들이 후작을 짓기 위해 많게는 100여만 원씩 잔금을 깎아주고 배추농사를 접고 있다는 설명이다.
“조생종 수박의 경우 4월 말에서 5월 초에 모종을 심어야 한다”는 오 씨의 말처럼 더 큰 문제는 후작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
탄중리 시설재배농가의 경우 90% 이상이 봄배추에 이어 수박을 심고 있지만 지난 몇 개월 사이 ‘금배추’에서 ‘애물단지’로 전락한 배추를 처분하지 못해 덩달아 수박 모종시기도 자꾸 늦어지고 있다.
늦어도 이달 중순까지는 수박 모종을 심어야 제철인 7월 중순 수확이 가능하기 때문에 농민들의 시름만 깊어지고 있는 실정.
일부에서 후작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봄 한철 자식처럼 키운 배추를 갈아엎고 있는 상황에서 농가들이 후작에 실패할 경우 자칫 또 다른 농작물의 가격 급등이 야기되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일고 있다.
“몇몇 농가는 일부 상인들이 배추 값이 폭락했다는 이유로 잔금을 지불하지 않고 나자빠져 큰 피해를 입었다”고 어렵게 말문을 연 오 씨는 “우리 같은 농사꾼이나 장사꾼이나 모두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모질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어 “농민들이 바라는 것은 큰돈이 아니라 피땀을 흘려 수확한 농작물이 제대로 대접을 받는 것”이라는 씁쓸한 말을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예산=김동근 기자 dk1hero@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