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이 온통 빨주노초파남보 꽃잔치다. 매화, 산수유, 목련을 필두로 벚꽃이 만개했고, 개나리와 진달래가 총천연색으로 색감을 바꾸고 있다. 꽃숭어리도 활짝 어깨를 펴 꽃향기는 더 진하다. 철따라 꽃이 피건만 봄꽃의 웃는 표정이 유난히 더 크고 야무지다. 더욱이 봄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작은 들꽃, 들풀은 주체할 수 없는 춘흥을 불러일으킨다. 사월의 들녘, 바람의 맛이 매일 다르듯 작은 야생화의 소소한 얼굴들도 시시각각 얼굴을 바꾼다. 지난 주말 들녘 봄꽃여행을 하며 무척이나 소란스럽게 살고 있는 '현재'를 잠시 내려놓았다.
◆어디 숨었다가 피었니?
봄이라고 생각했는데 봄이 없었다. 둑길을 걸어도, 논길을 걸어도, 여름은 여인들의 성급한 옷차림처럼 두세 발 빨리 와 있었다. 그 '여름 같은 봄'을 걸으며 봄을 확인할 수 있는 증빙물은 야생화였다. 볕이 있는 다랑논 언덕에, 숲길과 마을길 사이 작은 농로에, 먼지 흩날리는 신작로 옆에 보일락 말락 조그맣게 둥지를 틀고 있다. 말갛고 여린 얼굴이 싱그럽다 못해 귀엽다. 1㎞ 남짓 걸으면서 발견한 이 소중한 이름들은 냉이꽃, 양지꽃, 개불알꽃, 광대나물꽃이다. 이 꽃들은 바람들이 풀의 현(絃)들을 뜯고 지나간 자리에 있다.
왕벚나무는 마치 봉숭아물이 약간 바랜 듯한 색깔로 봄물을 한껏 길어 올린다. 살금살금 부풀어 오르는 꽃눈은 물이 잔뜩 올라 탱탱하다. 제비와 닮았고 제비가 올 때쯤 꽃이 핀다는 제비꽃(반지꽃)도 보랏빛으로 새치름하게 앉아있다. 수수한 차림일수록 향기는 짙은 법. 꽃이 작거나 색깔이 화려하지 않은데도 향기가 제법이다. 소가 잘 뜯어먹는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는 쇠뜨기는 볕이 강한 풀밭에서 소풍을 즐긴다. 이놈은 고사리와 친척 사이로 생식줄기 홀주머니이삭만 뻘쭉 나와 있어 멋은 없다. 옅은 보랏빛의 광대나물은 자세히 보면 진짜 광대의 얼굴과 닮았다. 마른 모래땅에 몸을 바짝 웅크리고 촘촘하게 박힌 꽃잔디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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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꽃들이 그러하듯 봄맞이꽃(봄마지꽃)과 별꽃도 볕을 향해 포복해있다. 특히 봄맞이꽃은 포와 꽃받침의 조각이 달걀모양인데 마치 프라이를 해놓은 거 같다. 향이 진하다 못해 달다는 등황빛 박태기나무는 목이 부러지듯 홍채를 내뿜는다. 이놈은 꽃핀 모습이 밥알 붙은 주걱처럼 보인다고 해서 밥풀대기나무라고도 한다. 떨어진 꽃송이들은 풀밭에 누워 피를 토한다. 날이 더우니 안 필 것들도 피어있다. 6~8월에나 핀다는 패랭이꽃이 '철부지'처럼 고개를 내민 것이다. 들녘엔 배꽃도 피었는데 매화꽃, 살구꽃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야생화들의 침묵. 달큼한 고요. 태양의 붉은 이불을 뒤집어 쓴 속된 눈망울. 꽃잎에 담긴 꽃말도 그리움으로 생장하고 무거운 육신을 살포시 받아들인다. 꽃에도 구멍이 있는가. 하얀 낯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자궁이 있는가. 적막한 사디스트의 부질없는 꽃시름이 일렁거린다.
◆꽃비가 내린다. 꽃비가!
진분홍빛 진달래가 능선을 태운다. 진달래는 한과 분노의 빛깔로 이 땅 민중들에게 호소력 있는 꽃이다. 그러나 진달래가 많은 산은 기실 헐벗은 산이다. 진달래는 '관목과꽃'으로 숲이 울울창창 들어선 곳에선 거의 피지 않는다. 그 옛날 춘궁기엔 민초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제 한 몸 아까워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 국화와 함께 화전(花煎), 꽃달임에 쓰인 것이다. 화전은 진달래꽃을 따서 찹쌀가루에 반죽한 뒤 참기름을 발라 지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꽃지지미'라고도 한다. 솥뚜껑에 기름을 두르고 꽃반죽을 놓으면 꽃은 암각으로 박힌다. 그러면 반죽에서 형형색색의 꽃이 피어나고 향기도 핀다. 고운 빛깔, 싱그러운 향기, 지지는 소리, 담백한 맛, 부드러운 촉감은 화전의 기막힌 오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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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꽃비도 내리고 있다.(꽃술이 비바람에 젖어 그 무게감을 못 이기고 떨어지는 것). 꽃비의 주인공은 벚꽃. 벚꽃은 1년에 단 1주일가량만 제 모습을 보여준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얀 꽃잎이 길 위로 화르르 쏟아져 내린다. 바람에 날려 떨어질 때는 꽃비인데, 검은 아스팔트 위에 점점이 뿌려지면 눈꽃이다. 바람 한번 잘못 불면, 비 한번 잘못 오면 세상과, 사람과 작별한다. 그래서 벚꽃에게는 분명히 유통기한이 있다. 1주일, 길어봤자 열흘.
잠시 꽃놀이를 늦추다보면 봄빛들을 도망친다. 선인장 꽃이 일 년에 한번, 그것도 딱 세 시간만 피고 지듯 때를 놓친 봄꽃들은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 꽃들은 생명을 다하는 순간 살포시 꽃씨를 내린다. 꽃씨는 다음해에 또 다른 생명을 발아할 것이고, 어떤 것은 나무가 되고 정원이 될 것이다. 향기로운 멀미. 지금 꽃의 향연으로 떠나보시라.
나재필 기자 najepil@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