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세월, 옛것과 낡음.

임권택 감독이 ‘천년학’을 지나 되돌아온 작품 ‘달빛 길어 올리기’는 우리가 잊고 애써 파괴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영화다.

101번째 영화의 소재로 한지를 선택한 임 감독은 ‘천년 가는 종이’를 복원하겠다는 장인들의 이야기를 빗대어 현대인들의 초상을 담아낸다.

영화는 만년 7급 공무원 필용이 전북 전주시청 한지과로 새로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이미 과장에 오른 고교 동창생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필용은 이번에야말로 5급이 되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중앙정부로부터 유일하게 전주에 남은 조선왕조실록 복원 작업을 맡으면서 필용은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예산은 고작해야 2억 5000만 원에다가 전통적인 방식의 본원 사업인지라 한지업자들의 반응은 냉랭하다.

게다가 한지 제작 과정을 찍고 싶어 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의 촬영 섭외 일까지 맡게 되면서 필용은 괴로워한다.

일에 불철주야 매진하던 그는 지원의 다큐 작업을 도와주면서 그녀와 조금씩 가까워지게 되고, 거동이 불편해 늘 집에만 있는 종이공예가인 아내 효경은 필용의 마음이 동요하고 있음을 눈치 챈다.

경쟁에 매달리는 현대인은 필용을 상징하고 효경은 공동체 문화를 잃어버린 채 정신적 장애를 지니고 살아가는 한국인을 표상한다.

지원은 여기에 한지를 매개로 한국인들의 아픔을 찾아 마주하기조차 힘든 현실을 풀어내는 중간자 역할이다.

이들 세 사람이 균형이 이뤄 극적 재미를 이끌어간다면 한지는 그 속에서 관객들에게 또 하나의 감동을 전달하는 매개체다.

   
 

이 작품이 전작들과 다른 것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과감히 들여온 점이다.

영화에는 필용이 보면서 연구하는 텔레비전 다큐와 지원이 찍는 한지 다큐 등의 장면이 펼쳐지면서 한지의 아름다움과 이를 재현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담겨진다.

영화는 임 감독의 오랜 화두이자 현대인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달빛 길어 올리기’를 접하면 영화라는 매체의 표현 영역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할 수 있는데, 감독의 삶과 영화의 품이 어떻게 합일될 수 있는지 절감하게 된다.

임 감독의 삶과 그의 초심이 진하게 베어나는 영화다.

또 영화에서 깜짝 카메오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임 감독의 가족이 출연한 건 물론 3대 영화제 위원장이 총출동했다.

김동호 부산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이 한지 장인으로, 민병록 전주영화제 위원장이 제지업자로, 김영빈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위원장이 공무원 필용의 형으로 나온다.

또 ‘임권택 영화예술대학’이 있는 동서대 장제국 총장은 전주시청 한지담당 국장이 됐고, 전주영화제 조직위원장인 송하진 전주시장, 김병기 전북대 중문과 교수 등이 등장한다.

박주미 기자 jju1011@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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