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식이 없으면 민족과 국가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역사에 대한 객관적이고 올바른 인식은 민족과 국가의 전제조건이라 생각합니다.”

애국지사 정완진(84) 옹의 강단(剛斷)이다. 일본제국주의의 폭압에 항거한 학생독립운동단체 ‘태극단’의 정단원으로 활약했던 정 옹은 28일 대전 유성구 노은동 자택에서 충청투데이와 가진 인터뷰에서 투철한 역사의식을 강조했다.

정 옹이 활동했던 ‘태극단’은 일제의 서슬퍼런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일어선 전국적 비밀결사 단체이다.

당시 소년티를 벗지 않은 16세 내외의 청년들이 주축으로 구성됐다. 정 옹을 축으로 구성된 태극단 단원들은 민족의 역사성와 자존감을 함양하는 학술연구토론회, 각종 체육활동을 실시하고 심신을 단련하는 등 민족자강운동을 통해 조국독립을 도모했다.

또 전국적 조직화의 장대한 목표를 가지고 일본제국주의를 척결하는 물리력 행사도 준비했을 정도로 과감했다.

하지만 정 옹은 조국을 등진 배반자의 밀고로 인해 학교수업 도중에 일본경찰에 연행됐고, 태극단은 독립운동의 날개를 채 펼치지 못하고 와해됐다. 당시 일본제국주의는 태극단에 가입만 해도 ‘치안유지법’의 칼날을 들이대며 철저한 탄압활동을 벌였다.

때문에 정 옹은 정당한 재판과정도 보장받지 못한 채, 6개월 동안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경찰서 철장 안에서 울분을 감내해야했다. 상습적 구타에 시달렸고 배고픔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을 수 없이 넘나들었다. 형언할 수 조차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실제 정 옹을 포함해 당시 경찰에 연행된 태극단원은 총 9명.

조심스레 꺼낸 정 옹의 빛바랜 사진첩에는 당시 옥고로 인해 유명을 달리한 앳된 얼굴의 소년 3명이 그대로 박제돼 있다. 흑백사진 속의 그들은 강건했다. 순국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올곧은 강직함과 용감함이 향기처럼 묻어났다.

이후 정 옹은 1943년 10월 대구형무소로 이송됐다가 천신만고 끝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해방이후 정 옹은 고등학교에서 20년, 경일대학교 영어영문학과로 옮겨 23년을 교편을 잡았다. 교육자로서 정 옹은 줄곧 역사의식 정립과 친일파 청산의 중요성을 강변했다.

정 옹은 “3·1절의 의미는 ‘자주정신’이다”라고 전제한 뒤 “요즘 교육은 출세위주, 경쟁 속에 함몰돼 역사의식의 중요성이 훼손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친일파들은 염치도 없고 대화도 불능한 괴물이 됐다”면서 “시기는 늦었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친일파는) 꼭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남북 분단이 평화적 방향으로 해결됐으면 하는 게 마지막 바람이다”고 덧붙였다.

서희철 기자 seeker@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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