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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계산은 높진 않으나 초입부터 급경사로 진을 빼며 해발고도를 잊게 만드는 산이다. 20여분가량 이어지는 급경사는 혹시나 해서 두텁게 입고 온 옷들을 후회하게 만든다. 그러나 고난은 그리 길지 않다. 급경사가 끝나면 능선이 구절양장 완만히 흐르는 데, 겨우내 쓸쓸했던 풍경들이 능선을 다라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빈계산으로 쏟아지는 햇볕은 이며 겨울에서 비껴나 있었다. 빈계산의 봄은 더디게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고 있다. 정진영 기자 |
가장 사랑받는 산이면서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산, 사람들이 잘 모르면서도 가장 많이 다니는 산. 도시와 산이 중첩되어 산에 오르면 도시가 한 눈에 펼쳐지는 '쌍생(雙生)의 피사체'. 겨울서 봄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수통골(이하 빈계산·수통골·도덕봉을 편의상 지칭)은 그래서 더 자별하다. 등산객 1900만 명 시대를 연 대한민국에서 수십 만 명이 드나드는 작은 산이지만 미쁘고 정감이 가는 이유다. 지리산의 자랑이 '높이'에 있지 않고 '깊이'에 있듯 빈계산도 그러하다. 이제 산은 한 겹 두 겹 겨울외투를 벗고 있다. 봄을 향한 나신(裸身)이다. 공자 가라사대 산을 좋아하면 어질어진다 했거늘, 이 이름 없는 불목하니의 발길도 어느덧 산길을 향한다. 이번 산행기는 내가 나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쓴다. 동행자는 정진영·양승민·이형규 기자다.
계룡산 천황봉에서 종종걸음을 치며 뻗어 나온 산줄기가 백운봉에 이르면 두 갈래로 갈라진다. 수통골에서 바라보자면 왼쪽이 금수봉이요, 오른쪽이 도덕봉이다.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도를 보면 흑룡산은 도덕봉이라고 표기돼 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이 도덕봉과 능선으로 연결된 백운봉, 금수봉, 빈계산 등을 한 오지랖 안에 집어넣어 흑룡산이라고 부른다. 높이 285m의 산이 암탉처럼 생겨 산 이름을 암컷 '빈(牝)'자를 따 빈계산(牝鷄山)이라고 하는데 산이 위치한 대전시 유성구 계산동도 '닭(鷄·계)', 계룡산도 닭인 셈이다. 수통골은 골짜기가 길고 물이 통하는 골짜기여서 이름 붙여졌다고도 하고, 금수봉과 도덕봉 사이 협곡이 수통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서남쪽 백운봉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흘러오는 건천(乾川)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물굽이를 동쪽으로 틀어 수원이 풍부한 못의 형태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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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번쯤 온 것 같다. 처음엔 지리적 접근성이 좋아서 왔는데 이제는 산세가 좋아 온다. 한창 다이어트를 할 때는 매일 오다시피 했다. 여유가 있으면 보통 4시간 코스를 타고 바쁘면 2시간짜리를 택해서 산행한다. 이번 등산은 눈이 내린 직후라 겨울과 봄이 중첩돼 더 아름다웠다. 한걸음 디디면 겨울, 한걸음 디디면 봄이 밟혔다."
-빈계산 일대 마을 지명이 독특하다고 들었다.
"옛날부터 써온 우리말 이름들이 많다. 금수봉 동쪽의 나지막한 산을 암탉산이라 한다. 뒷산 모양이 노루 같다 해서 노루정이, 대장간이 있었다 해서 대장말, 차돌이 많이 박힌 산이 있어서 차돌모랭이, 사기 굽던 가마터가 있기 때문에 사기막골, 주위에 띠가 많아서 띠울이란 지명이 있다. 이밖에도 동산, 늦바위, 당산말, 두루바위 등 암탉산 자락의 모든 마을 이름이 순수하고 고즈넉하다."
-흑룡산(빈계산)은 어떤 산인가.
"선인들은 흑룡산을 계룡산 동쪽을 감싸주는 산으로 여겨왔다. 즉 계룡산을 천체(天體)의 성지로 보았고, 흑룡산이 그 성지를 지키는 또 하나의 성지라고 믿어온 것이다. 결국 흑룡산은 계룡산을 지키는 산지기이면서 하나의 독립된 명산이다."
-산행의 출발은.
"수통골 입구 주차장에서 보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오른편은 도덕봉, 왼편은 빈계산과 금수봉 가는 길이다. 그 사이에 있는 골짜기가 수통골인데 초심자들은 보통 수통골로 올라가 다시 수통골로 돌아온다. 수통골은 그리 크지 않으나 폭포도 있고, 넓은 자갈밭도 있으며, 양편에 짙은 숲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산객은 빈계산 방향과 도덕봉 방향을 택한다. 어디로 가든 결국은 한 지점으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빈계산 코스가 지겨우면 도덕봉 코스, 도덕봉이 싫증나면 빈계산 코스를 택하면 된다."
-빈계산 방향으로 오른다면.
"길은 처음부터 높고 가파르다. 초장에 힘이 다 빠질 만큼 길손에게 쉬이 내주지 않는다. 몸의 엔진을 아이들링할 여유조차 없다. 오르고 또 올라도 헛바퀴를 도는 듯 지리하고 밉살스럽다. 한참을 걷다보면 우심방·좌심방이 번갈아가며 아파오고, 허파꽈리와 종아리가 팽창해 압점을 짓누른다. 지금까지 수십 번을 오른 길이지만 언제나 그랬다. 하지만 넓고 한적한 육산의 등로에 퍼지는 소나무 내음이 곰살맞다. 빈계산 정상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50여 분 정도 걸린다. 정상에 올라 장쾌한 풍경을 보노라면 자연스럽게 세안(洗眼)이 되니 꾹 참고 오르시라. 멀리 계룡산 줄기가 보이고, 금수봉과 도덕봉도 보인다."
-금수봉 가는 길은.
"이곳의 등로는 대체적으로 한산한 편이다. 그 많은 산객들이 어디로 흩어졌는지 고적할 정도다. 등고선의 정점에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급한 비탈길을 내려섰다가도 다시 치며 올라가고, 올랐다싶으면 다시 저점으로 치닫는다. 조금 힘이 들지만 그리 먼 거리가 아니므로 체력적인 부담은 크지 않다. 멀게 보이던 계룡산이 한결 가까이 보이고, 이 산 전체를 통칭하는 수통골이 한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사적인 질문 하나 하겠다. 사계절 중 어느 때가 산 오르기에 가장 좋았는가.
"봄날의 산은 담담히 웃는 것 같고, 여름산은 짙푸르러 물에 빠진 것 같고, 가을산은 밝고 맑아 화장한 것 같고, 겨울산은 참담하여 잠자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어느 때라도 산의 사계절은 사색(四色)과 사색(思索)으로 피고진다. 들쭉날쭉한 등뼈에 초록물이 들었다가도 겨울에는 말기의 색감을 띠어 더욱 앙칼지다. 봄이면 꽃물이 들고 여름엔 꽃의 향기가 기분 좋은 멀미를 일으키니 사계절 모두 매력적이다."
-산에 오르며 보통 무슨 생각을 하나.
"돈, 삶, 여자, 빚, 행복, 가족, 기타 등등…. 부질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하지만 툭툭 털어버릴 수 있기에 그 부질없음이 좋다. 산은 거짓이 없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걷는 만큼 부질없는 것들을 걷어낼 수 있다. 생각을 절현(絶絃·줄을 끊음)하는 것이다. 산행을 하다보면 '가출'이 아니라 '출가'한 듯한 느낌이 든다. 어지럽혀진 육화가 정화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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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줄박이(왼쪽)와 박새가 땅콩을 먹기 위해 등산객의 손에 앉아있다. 야생조류 중 드물게 겁이 없는 곤줄박이는 먹잇감이 귀해지는 겨울이면 애완견마냥 사람들을 따른다. 어린아이가 보채듯 울어대며 맛나게 먹이를 쪼는 곤줄박이를 바라보다 보면 사람들도 덩달아 착해진다. 우희철 기자 photo291@cctoday.co.kr |
"IMF때 등산을 시작했다. 물질적인 것도 물질적인 거지만 정신적으로 황폐해졌다. 머리 속에서 황사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좋아 산에 올랐는데, 나중엔 사람만큼 산마저 사랑하게 되더라. 인간은 산을 만들 수 없지만 산은 인간을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지나침과 분수를 모르고 쑥대위의 여치처럼 혼자 춤추고 혼자 노래 부르기 좋아한다. 소인은 산으로 숨고 대인은 사람 속으로 숨는다는 말이 있다. 산은 이기적이지 않다. 공동의 목표가 있다면 협력해서 정상을 밟아야한다. 햇볕과 그림자의 경계선에 칼과 불이 숨어있듯 산은 홀로서기가 아닌 '여럿이'가 해야 위로 받고 위로할 수 있다. 산에 가면 동행하는 사람도, 살짝 눈인사하는 초면의 사람도 살붙이처럼 정겨워지는 것은 산객들의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빈계산 얘기를 해보자. 빈계산에서 40여 분 걸리는 금수봉은 어떤 얼굴인가.
"낡은 정자가 하나 서 있고, 멀리 계룡시의 높고 낮은 산들이 보기 좋게 다가선다. 금수봉은 이름 그대로 비단으로 수놓은 듯 아름답다는 뜻이다. 봄에는 진달래꽃과 철쭉이 아름답고 신록이 싱그럽다. 여름에는 숲의 녹음이 짙고, 가을에는 단풍이 고우며, 겨울에는 설경이 좋다. 금수봉 바로 옆 봉우리인 백운봉도 풍광이 좋다. 고운 이름을 가진 두 봉우리가 한 곳에 있는 곳은 국내에서도 보기 드물다. 금수봉이 또 좋은 것은 산행 들머리와 끝머리가 도덕봉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구절양장 같은 능선 끝에 있는 곳이 도덕봉이다. 이 등로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입체적으로 배치돼 있어 길의 단조로움을 깨운다."
-또 하나의 봉우리 도덕봉(534m)이 이번 산행의 최고봉 아닌가.
"옛날에 이 골짜기에 도둑들이 많아서 도둑골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도적골에 있는 산이라 해서 도적봉이라 부르던 것이 도덕봉으로 발음이 전이됐다는 얘기다. 사실 정확한 어원은 모른다. 도덕봉 정상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움직이면 전망바위가 있다. 전망바위에서 북으로는 갑하산, 오른쪽 아래로는 현충원이 보인다. 북동쪽 아래로는 유성 골프장 필드가 내려다보이고, 멀리로는 월드컵경기장과 유성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는 서구 아파트단지와 대덕연구단지 엑스포과학단지까지 보인다."
-이제 하산길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벼랑을 탄다. 작은 봉우리가 나오는데 암벽과 철계단도 있다. 바위에 설치된 난간대를 잡거나 밧줄을 잡고 절벽구간을 내려서면 된다. 이제까지의 길이 육산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면, 하산 길에는 제법 암릉 구간이 나타나고, 길도 조금 가파르다. 하산길이라고 마음을 내려놓다가는 발을 헛디딜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30여 분 정도 뱀처럼 구불텅한 등로를 따라 내려가면 처음 시작했던 수통골 주차장이 나타난다."
-산행보다 뒤풀이가 더 독하다고 들었다.
"산은 4시간 타면서 술은 8시간을 마신 적이 많다. 핑계지만 사람이 좋았기 때문이다. 마치 본능 같았다. 하지만 여흥이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닌가. 그저 즐기려고 한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술을 나누는 것도 인생의 흥이자 본연이다. 봄이 오고 있다. 혹독한 겨울이 있기에 봄이 더욱 달콤한 법이다. 봄옷으로 갈아입은 산의 얼굴을 하루빨리 보길 권유한다."
나재필 기자 najepil@cctoday.co.kr
<◆산행길잡이> △수통골 주차장~빈계산~금수봉~도덕봉~수통골 주차장:말발굽 형태의 코스로 크게 반원을 그리며 회귀하므로 가장 길다. 약 4시간 소요. △수통골 주차장~입산통제소~보(수로)~자갈밭 삼거리~작은 수통골(금수봉과 암탉산 사이)~암탉산 잘록이~금수봉 주봉(팔각정):약 1시간 30분 소요. △수통골~금수봉~암탉산 잘록이~암탉산~수통골 주차장:약 3시간 30분 소요. △성북동 방동저수지~(위쪽 신뜸마을에서 골짜기로 오름)~암탉산 잘록이~금수봉:약 2시간 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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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봉으로 향하는 능선에서 만난 돌탑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