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누가 봐도 모범생처럼 정돈된 인상이다. 가지런히 정돈된 이목구비와 옷맵시는 약간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깔끔한 성격을 말해준다. 각이 살아있는 재봉선과 순백의 와이셔츠, 그 위를 반쯤 덮는 검은 베스트는 ‘나는 똑바르다’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시각적 효과를 타인들에게 줄 만하다.

굳게 다문 입술은 약간의 미동도 없다. 부드럽게 내려오는 턱선은 분명하게 배경과 얼굴을 분리시켜주고 있다. 감청색 바다 빛을 담은 눈빛은 한 점을 응시하다가 가끔 하늘을 올려다본다.

쉽게 말문을 열지 않는다. 떠오르는 기억을 애써 떨쳐내려는 움직임 같다. 영겁과 같은 찰나의 반복. 지루한 시간의 싸움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띄엄띄엄 공기의 파동이 고막을 자극한다. 약간 경직되고 떨리는 저음의 투명한 음성이다.

“난 평범하게 살아왔다.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 회사원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이룬 업적도 없고, 누구나 공감할 일상적인 삶을 영위해가는 사람이다.”

한국농어촌공사 충남지역본부 최형순 과장(55)은 범인(凡人)이다. 자신의 삶을 지극히 평범하다고 평가했다. 최 과장은 범인(凡人)과 범인(犯人)의 분명한 경계처럼 자신의 삶을 ‘평범한 삶’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평범한 삶은 그대로 또 다른 삶에 울림이 되기도 한다. 아주 오랜 된 책상서랍에서 우리는 빛 바랜 교과서에 녹아있는 평범한 ‘철수’와 ‘영희’의 이름을 발견한 유쾌함 같은 것처럼…

최 과장의 이야기는 사람 사는 세상, 사람냄새가 서린 책상서랍 속 이야기이다.

◆자식으로서의 삶…가난이 어울리지 않던 정미소 아들

최 과장은 시골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3남 2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밑으로는 여동생이 하나 있다. 남부럽지 않는 삶이었다. 은수저는 아니지만 최소한 ‘밥풀이 묻은 수저’는 물고 태어난 격이다.

최 과장은 “아버지가 정미소를 경영해 초등학교 다닐 때는 집에 일꾼이 2명이나 있었다”면서 “지역에서도 신망받는 집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가끔 우리네 인생은 예상하지 못한 삶의 무게에 짓이겨 숨조차 쉬기 어려울 때가 있다. 밀가루를 팔러 나가면 바람이 불고 치킨 집을 열면 조류독감이 뉴스에 연일 보도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노여워하지 말라’는 말을 한 위인의 낯짝이 보고 싶다.

그는 “정미소 일이 갑자기 잘 풀리지 않아 가세가 기울면서 경제적 이유로 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했다”며 “부모님이 행상을 꾸려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돈을 마련해 온다고 한 날, 부모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부모님이 거금을 날치기 당했다”며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최 과장은 “처음에는 온갖 공장과 막노동판을 전전하면서 삶을 꾸려 나갔다”면서 “내 학비도 문제지만 여동생이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다”고 말했다.

가난과 행복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하지만 최 과장에게 가난은 ‘배고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단지 앞으로의 행복을 짓궂게 저당 잡힌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최 과장은 “여동생을 학교에 보내고 군대에서 검정고시를 패스했다”며 “가난한 삶의 연속이었지만 가난을 지우려는 순수한 마음가짐이 존재했다”고 회상했다.

아울러 “이 마음가짐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며 “남들처럼 편안히 공부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애감도 분명히 있었지만, 여동생과 가정을 책임져야한다는 생각 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자식이 되는 삶…1만 2000명의 부모님을 둔 사람

최 과장은 1981년 한국농어촌공사(당시 농업진흥공사)에 입사했다. 정미소를 경영한 아버지의 그림자였을까. 최 과장은 성장배경과 입사동기를 분명히 했다.

최 과장은 “어렸을 때 농촌에서 생활하며 행복하고 즐거웠다”면서 “아버지가 정미소를 경영했던 옛 기억과 함께 농어촌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순수한 바람이 입사동기였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한국농어촌공사의 자랑거리인 ‘브라이트-KRC’ 사업을 적극적으로 실현한 인물이다. 브라이트-KRC 사업은 농어촌의 어르신들에게 돋보기 안경을 무료로 증정해 드리는 사업이다.

최 과장은 “브라이트-KRC 사업을 통해 충남에 있는 1만 2000여 명의 농어촌 어르신에게 선명한 세상을 선물했다”며 “농촌에 가면 어르신들이 아들보다 고맙다는 말을 자주한다”고 말했다.

이어 “따지고 보면 충남에만 1만 2000여 명의 부모님이 생긴 셈”이라며 “(브라이트-KRC 사업은) 2010년에는 한국농어촌공사 홍문표 사장의 적극적 주창으로 전국으로 확대 시행돼 더 큰 보람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과거의 기억은 내일의 행동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최 과장의 이러한 순수한 동심은 농어촌에 새로운 희망과 소득을 창출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최 과장은 1987년 에너지절약 유공 사장 표창, 1997년 새마을운동 추진유공 대통령 표창, 2007년 고객만족 사장 표창, 2009년 홍보우수 사장 표창 등 10개의 타이틀을 보유하게 됐다.

26살 준수한 용모와 패기가 넘쳐던 청년은 어느새 30년의 시간을 한국농어촌공사를 위해 헌신하고 흰머리가 성성한 노병으로 변했다. 그러나 농촌을 위해 일하고 싶다던 순수한 바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자식을 키우는 삶…가난과 행복은 별개가 아니다

최 과장은 아내 신지순(52) 씨 사이에 원영과 화영 두 아들을 두고 있다.

가난이 어울리지 않았던 정미소 아들의 봄은 분명 따뜻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982년의 봄은 달랐다.

최 과장은 “한국농어촌공사 직원이 이모를 소개시켜 줘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됐다”며 “서천 출신의 순수한 시골처녀로 서로 조심스럽게 좋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결혼 당시에는 가난의 짐이 너무나 과중했다”며 “아내는 28년 동안 가난과 직장생활로 인해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나로 인해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다”고 미안해했다.

최 과장은 결혼 이후에도 학업을 소홀히 하지 않고 대전실업전문대학교 경영학과를 거쳐 1991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영학과를 늦깎이로 졸업하게 된다. 늦게 배운 학구열과 학우애는 무서웠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우들과 모의주주 총회 및 학과 축제 등을 주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아내는 만학도의 철없는 나날(?)을 말없이 받아줬다.

최 과장은 “원래 1등을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아 재학시절이나 직장에서도 이런 성향이 남아있다”며 “하지만 퇴직하면 오손도손, 편안하게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 과장은 두 아들에게 항상 ‘꿈을 크게 가져라’라고 말한다. 가난과 행복은 쉽게 어울릴수 없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싼 일수’처럼 허무맹랑한 조합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두 아들을 1년 씩 일본 동경에 요미우리신문 장학생으로 보냈다”면서 “아마 두 아들도 지난날의 나처럼 ‘주경야독’을 하면서 어려운 시간을 꿋꿋하게 버텨줬다”고 말했다.

가난했지만 결코 가난하지 않았던 이 사람. 굳게 다문 입술이 어느새 큰 울림으로 떨리고 있었다.

글=서희철 기자 seeker@cctoday.co.kr

사진=김호열 기자 kimhy@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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