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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산악인 이상은 씨와 남편 김성선 씨. |
쿰부 히말라야 니레카(6159m)봉을 세계최초로 등정해 기네스북에 오른 대한민국 대표 여성산악인 이상은(39·여) 씨가 처음 암벽에 올랐을 때 느꼈던 희열은 아직도 가슴에 선연하다.
생전 처음으로 암벽등반에 오른 날, 그 곳에서 발견된 것은 자유였다. 암벽에 오르며 자신이 속한 땅을 벗어날수록 마음이 비워지고 또 다른 마음이 채워졌다.
방금 꺼진 성냥의 진한 냄새처럼 그날 그녀의 인생에 끼어 든 ‘산’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이상은. 그녀는 중미의 최고봉인 오리사바(5747m)를 비롯해 이쯔타찌우아틀(5300m),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5895m), 터키 최고봉 아라라트(5135m) 등 세계 유수의 산을 등반한 자타가 공인하는 산악인이다.
이와 함께 2회에 걸친 에베레스트 BC(Base Camp·베이스 캠프)트레킹과 안나푸르나 BC트레킹, 일본 북알프스 등반, 랑탕 히말라야 트레킹 등을 완등한 베테랑이다.
고된 등반과정 속에도 네팔 오지에 머물며 학교건립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아름다운 동행, 희망학교 짓기’ 사진전을 개최하는 등 나눔의 산림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또한, 지난 9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무대로 펼쳐지는 ‘존 뮤어 트레일’에 사진 감독으로 활동할 만큼 사진에 조예가 깊으며 ‘여성 산악 사진가’로도 유명하다.
비단 세계적인 최고봉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흔적을 간직한 우리 주변 산길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그녀는 시간이 허락되면 수통골이나 마을 옆 조그만 동산을 꾹꾹 밟고 다닌다. 한 걸음 한 걸음 마다 산이 주는 정겨운 감동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불순한 마음으로 산을 품다
그녀와 산의 첫 인연은 불순한 계기로 맺어졌다. 당시 25살이었던 그녀는 단지 좋아하는 선배가 산악클럽에 있었기 때문에 산을 타게 됐다고 실토한다.
선배가 적을 뒀던 클럽은 히말라야를 오가는 전문적 산악 클럽으로, 본격적으로 사귀려면 산을 좋아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에 그녀는 “산과 궁합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며 “대전 등산학교 1기 모집이 나와서 이 때 5주 간 등산교육을 받게 됐다”고 산과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그녀는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산으로 덕유산을 손꼽는다. 지금의 남편인 당시 선배와 함께 처음으로 등반한 산인 동시에 청혼을 받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산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것은 대둔산이다. 그녀는 “처음 암벽을 올랐을 때 너무 무서웠다”며 대둔산 일대 용문골 신선대의 쭉 뻗은 암벽에 매달렸던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나 무서움을 극복하자 이내 신비로운 세계를 향한 계단의 입구가 열리게 됐다.
얇은 한 가닥의 자일로프를 온전히 신뢰하며 손을 놓는 순간 산이 그녀를 품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순간 판도라의 상자를 연 느낌이었다”며 “개념적으로만 자유라고 하는데, 아! 자유롭다. 이런 게 자유구나, 뭔가 가슴의 막이 하나 툭 터져나갔다”며 그날의 감회를 잊지 못했다.
◆산은 엄마의 품
그녀는 산을 ‘엄마의 품’이라 단언한다. 산은 그녀의 모든 것을 보듬어 주기 때문이다. 어느 산이든, 그 곳에 들어가는 걸음걸이 마다 치유의 신비가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는 “몸이 아플 때 산에 가면 신기하게 기운을 보충받게 된다”며 “내가 산을 좋아해서 산도 나를 품어주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산에 가면 몸이 좋아진다”고 말한다.
정신적 빈곤함을 느낄 때면 어김없이 덕유산을 찾아간다. 특히 겨울의 서리를 품에 안은 덕유산은 그녀에게 최고의 선물이다. 겨울에 서리가 내린 덕유산은 하얀 실루엣과 검은 능선만 보이며 단순함의 미학을 전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한다. “가을에 앙상한 나무와 낙엽도 물론 아름답지만, 특히 겨울산은 더욱 아름답다. 겨울 덕유산에 눈이 내리면 산 전체가 정말 간단명료하다. 알게 모르게 간단명료함은 일상의 복잡함과 소소함에서 받은 상처와 어려움들을 치유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어려운 산!
어느새 산악인이란 새로운 이력을 만들어낸 그녀에게도 여전히 산은 넘기 어려운 도전 과제이다. 등산을 할 때 느껴지는 육체적 고통은 킬리만자로나 히말라야나 모두 똑 같다.
예비 산악인 시절 그녀는 덕유산을 오르며 처음으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고 한다. 그녀는 “숨은 목까지 차오르고 겹겹이 쌓여있는 5개의 봉우리를 보며 저기까지 어찌 가나하는 생각에 까마득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몸의 고통으로 당장 포기하고 싶었던 덕유산 첫 종주는 오늘날 그녀를 지탱해주는 가장 큰 결실로 남아있다.
그녀는 “덕유산을 종주할 때 너무 힘들었지만 뒤집어 생각해 봤다”며 “신기하게도 힘은 들었지만, 내 마음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오늘 밤에는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포기하지 않고 가면 5개 봉우리 저 너머에 이미 내가 넘어가 있는 신비함이 있을 것이다”라며 스스로에게 고뇌였다고 한다.
그녀는 “그때서야 선배가 산이 인생이라고 한 말을 깨달았다.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느새 저 너머로 가 있는 것, 포기하지 않는다면 삶은 이끌어져 간다. 산은 인생의 축소판이다”고 단언한다.
◆‘달팽이 산행’을 통한 나눔 실천
현재 대전 갤러리아 타임월드에서 라푸마를 경영하고 있는 그녀는 일상에서 산을 오를 수 있는 기회를 나누기 위해 ‘달팽이 산행’을 추진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고객들을 대상으로 ‘달팽이 산행’을 권유한다. 그녀는 달팽이로 이름을 정한 이유에 대해 “누구라도 느긋하고 천천히 걸어도 좋기 때문에 그렇게 정했다”고 설명한다. 누구보다 산이 주는 풍요로움을 잘 아는 그녀이기에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산이 주는 느림의 미학’을 전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펼쳐보였다.
◆또 하나의 산 ‘동반자’
그녀를 정서적으로 품어주고 끝 없는 사랑과 응원을 보내는 또 하나의 산이 있다. 그녀와 산을 중매해 준 영원한 동반자이자 연인인 남편 김성선 씨. 남편 역시 베테랑 산악인으로 유명하다. 특히 지난해는 만화가 허영만 선장을 필두로 13명의 중년 남자들이 모여 한반도 해안선을 요트로 일주하는 기행을 보였다. 침몰하기 직전의 명품 요트를 수리해 서해안 끝에서 동해까지 완주했다.
허 화백과 동료들의 인연은 2004년 백두대간 종주를 하면서 시작됐다. 이 멤버와 함께 한 달에 한 번 비박과 2년 마다 해외 트레킹을 하는 등 산과 남편의 인연도 심상치 않다.
비박이란 원래 독일어의 비바크(Biwak), 프랑스어의 비부악(Bivouac)이 어원으로 ‘Bi(주변)’와 ‘Wache(감시)’의 합성어로 알려져 있다. 산악인들에게 ‘비박’이란 단어는 더 이상 산행이 불가능해진 긴급 상황에서 텐트 없이 밤을 보내야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비박’ 하면 절벽 상의 좁은 턱에 걸터앉거나 혹은 눈밭에 쪼그리고 앉든지, 혹은 설동을 파고 들어가 하룻밤을 견디는 등의 험악한 상황을 연상케 마련이다.
이러한 ‘비박’이 새로운 산행 행태로 자리 잡은 지는 이미 오래다. 텐트를 이용한 야영에 비해 채비도 간단하고 텐트 안에서 지내는 야영생활에서 느낄 수 없는 신선함과 낭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산을 “가장 행복하고 주위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누는 장소”라 단언한다. 산이 좋은 만큼 부인이 산과 외도(?)를 누구보다 이해하고 존중해 준다.
실제 추석기간 부인이 미국 ‘존 뮤어 트레일’에 참가해 미역에 다시다와 소금만으로 준비된 추석 만찬을 먹고 있을 때, 남편은 춘장대 오토 캠핑장 ‘비어 치킨’에서 연어회와 이탈리안 음식을 먹으면서 지구촌 다른 곳에서 같은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국만리 떨어져 있는 아내를 마음 속 깊이 떠올리면서 무사귀환만을 소망했다.
그러나 김 씨는 부인의 잦은 산과의 외도에 대해 “통장 비밀번호도 알려주지 않고 떠나서 곤란할 때도 있다”고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김 씨는 “등산도 사진도 내가 선배였는데, 이젠 그녀가 선배같은 존재이다”라며 “주위에 대해 깊고 따뜻한 시선으로 대하는 법을 집사람에게 배우고 있다”고 아내에 대한 칭찬도 서슴지 않았다.
한편, 지난 9월 이상은 씨가 사진감독으로 참가한 ‘존 뮤어 트레일’은 오는 27일 KBS 수요기획에서 방영된다.
이상은씨는... ‘여성산악사진가’로 알려진 이상은 씨는 대학 졸업 후 1997년 대전 등산학교 1기 수료를 계기로 등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003년 네팔에서 개최된 ‘제1회 아시아 여성 합동 등반대’에 한국 대표로 등반, 쿰부 히말라야 니레카(6159m)봉 세계최초 등정에 성공해 기네스북에 올랐다. 이어 중미 오리사바(5747m), 이쯔타찌우아틀(5300m), 리말린체(4400m),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895m)를 연이어 등정했다. 2004년에는 ‘제2회 아시아 여성 합동 등반대’에 한국대표로 참가했으며 백두대간 종주, 대전둘레산길 잇기 산행 진행, 에베레스트 및 안나푸르나 BC트레킹, 랑탕 히말라야 트레킹 등에 참가했다. 특히 2008년에는 ‘네팔, 희망학교짓기’ 프로젝트에 참가하며 ‘아름다운 동행-네팔, 희망학교짓기’ 사진전을 개최한 바 있다. 이 외에 EBS 하나뿐인 지구 ‘숲을 걷는 또 다른 방법’을 비롯해 지난 9월 KBS가 주관한 미국 ‘존 뮤어 트레일’에 사진감독으로 참여하는 등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산행문화를 알리는 데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오는 18일 ‘제9회 산의 날’을 맞아 국무총리표창을 수여받는다. |
글=박재현 기자 gaemi@cctoday.co.kr
사진=우희철 기자 photo291@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