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 74주년, 친일의 역사 수면 위로 上. 친일 인사 손 탄 독립운동의 기록]
일제 때 징병 선동 김기진, 보령 김좌진 장군 묘소 비문 작성
친일인명사전 등재 장우성은 윤봉길·이순신 장군 영정 그려
모호한 기준에 교체 난망… 김영권 도의원 “제도 정비 나설 것”

사진 = 연합뉴스

 

[충청투데이 조선교 기자] 광복 74주년을 맞은 가운데 전국 각지에서는 일제·친일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역사적 치욕으로 남아 소멸이 불가피한 잔재들도 일부 자리잡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친일의 흔적을 통해 아픈 과거사를 직면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육의 도구로 활용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추세다. 이와 관련해 충남의 현 상황과 나아갈 길을 살펴본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2008년 타계한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의 한이 서린 문장이다. 조 선생은 광복 이후에도 독립운동의 지조를 잃지 않고 친일 청산에 앞장서왔다. 하지만 광복을 목전에 두고 순국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은 이러한 기회조차 손에 쥐지 못했다.

오히려 일부 순국 독립운동가의 기록이나 상징물 제작에 친일 논란이 있는 인사들이 참여한 모순이 충남도내 각지에서 드러나면서 친일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는 모양새다.

지난달 구성된 충남도의회 친일잔재청산특별위원회와 충남도가 도내 국가·도 지정 문화재를 조사한 결과 1건의 친일 잔재가 확인됐다.

앞서 2010년경 한 차례 논란이 일기도 했던 김좌진 장군의 묘소(보령시 청소면 소재)에 위치한 기념비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기진이 비문을 작성했다.

김기진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대동아전쟁의 정당성’을 내세운 시를 발표했고 일본어 보급과 내선일체 철저, 직역봉공 등을 거론하거나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기념한 시를 발표하는 등 징병과 학병을 선동한 것으로 지목받고 있다.

문제는 그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 명단 705인(2009년)에도 이름을 올렸지만 역설적이게도 독립투사의 구심점인 김좌진 장군의 비문을 작성한 데다가 여전히 문화재 일부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해당 비문은 1957년 안동 김씨 문중에서 같은 본관인 김기진에게 직접 의뢰해 작성했다.

앞서 지난해에는 지역 향토사학자가 민원을 제기해 김기진의 친일 행적을 기록한 외비를 세우자고 건의했고 지자체 차원에서도 공적 역할에 적극 나서겠다는 입장이지만 윤곽이 드러나지 않았다.

이와 함께 도내 소재 위인들의 표준영정 2점도 친일 논란이 있는 화백이 그려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장우성이 그린 윤봉길 의사(예산 충의사·1978)와 이순신 장군(아산 현충사·1973)의 영정이다. 그는 1944년 조선총독부 정보과 등이 후원하는 결전미술전에 출품해 입상하는 등의 행위를 지목받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장우성은 앞서 유관순 열사의 영정도 제작했지만 친일 논란이 지속 중인 가운데 2007년 실제 유 열사의 얼굴과 차이가 난다는 이유로 표준영정 지정이 취소된 바 있다.

일각에서는 표준 영정에 대한 저작권료가 친일 논란이 있는 작가의 유족들에게 지급되고 있다는 점과 관련해 공분이 일고 있지만 친일 행적이 표준 영정 지정·취소 여부에 해당하지 않아 선양단체나 독립운동가 유족의 요구에도 쉽사리 교체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김영권 충남도의회 친일잔재청산특위 위원장은 “친일 화가가 그린 표준 영정의 지정 취소를 위해 국가 차원의 제도 정비를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교 기자 mission@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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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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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은 바로 유관순 열사다. 우리 역사 속에 자리 잡은 유 열사의 위상은 그만큼 견고하다. 3·1운동은 일제 아래서 각계각층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 항일운동으로 세계사적 의미 또한 작지 않다. 하지만 유 열사의 서훈등급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기껏해야 '3등급'(독립장)에 불과하다. 역사적 공적과 국민 인식도에 비해 현격하게 저평가돼 있다는 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행정안전부에 대한 어제 국감에서도 유 열사의 등급 격상 문제가 주요 이슈로 제기됐다. 자유한국당 이명수 의원은 "면밀한 연구와 검증, 재심사 등을 통해 필요한 조치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적폐 청산'은 바로 이런 데서 시작해야 된다는 이 의원의 지적이 백번 맞다. 선열들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상흔을 역사에 더 이상 남기지 않는 것은 이 시대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2년 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유 열사의 서훈 상향을 위한 상훈법 개정 촉구운동이 전개되고 있어 그나마 주목을 받고 있던 터였다. 상훈법상 서훈 1등급(대한민국장)에는 김구·안창호·안중근 등 30명, 2등급(대통령장)에는 신채호·신돌석·이은찬 등 93명, 3등급에는 유 열사를 포함, 김도현·김라리아 등 823명에 이른다. 살펴보건대 1962년 당시 유 열사에 대한 정부의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과정이 허술했음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유 열사는 '한국의 잔다르크', '3·1운동의 꽃'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화학당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유 열사는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인 천안에서 3000여명을 모아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천안·연기·진천·청주 등의 학교와 교회를 돌며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전국 만세운동으로 확산된 계기가 됐다. 일본 경찰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다가 최후를 맞았다. 

유 열사를 통해 애국 애족의 정신, 정의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불굴의 의지를 거듭 확인한다. 상훈법부터 개정하여 유 열사의 서훈 등급 변경의 근거를 마련하자. 2015년 상훈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19대 국회서 자동 폐기된 바 있다. 20대 국회서도 개정안이 계류된 상태다. 정치권이 그 실상을 바로 잡는 게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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