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선과 조화를 이루며 길게 이어진 공산성. 1600년의 세월 동안 저 성벽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었이던가? 바로 우리의 역사다. 백제문화제를 맞아 잃어버린 역사 백제를 찾아보자.  
 
충남 공주를 지나가다보면 금강 건너편에 길게 이어지며 제법 멋드러진 성곽이 보인다. 밤에 지나갈 때면 색색의 조명을 받아 더욱 멋진데, 이곳이 공산성이다. 공산성은 우리나라에 남은 성 유적 중 전체를 온전히 보존한 몇 안되는 곳이기도 하다.공산성은 패망한 백제의 유물이기도 하지만, 이후에도 그 전략적 가치 때문에 조선시대까지 증개축되며 계속 사용됐다. 그래서 그 곳에는 우리나라 역사의 흔적이 색다르기도 하다. 시민들의 멋진 쉼터로 거듭난 공산성이지만, 백제문화제를 앞두고 바라본 공산성은 의미가 남다르다.

부흥의 기대로 꽃피운 웅진시대

공산성의 축조 연대는 정확이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4~5세기 경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기 475년,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압박을 받은 백제 문주왕은 한강을 따라 마련된 수도를 버리고 멀리 이곳 공주까지 내려왔으니 얼마나 비통했을까.

이후 성왕이 제2의 부흥을 계획하며 부여로 천도하기까지 약 64년간 공산성은 백제의 중심이 됐다.

이후에도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공산성은 부흥운동의 거점이 되다가 소멸된 후에도 고려의 군사 거점으로 계속 사용됐고, 조선시대에 역시 지역 요충지 역할을 했다. 1623년 이괄의 난 때는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오기도 했다.

그러면 공주는 왜 백제의 수도가 됐나?

광개토대왕의 활약으로 대륙을 석권한 고구려는 이어 즉위한 장수왕이 남쪽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남하정책이 시작된다.

이 때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에 성을 58개나 빼앗기며 한강 이북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됐다.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인 한성의 북성과 남성을 차례로 공략했고, 이 전투에서 백제는 개로왕이 전사하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다. 다행히 고구려군이 한성을 완전 점령하지 않고 한강 이북으로 철수했지만, 백제는 한성을 더 이상 지키기가 어려워 천도를 단행한다.

그렇다면 왜 공주인가?

이는 당시 담로라는 백제의 권력 체계 때문이다.

전사한 개로왕에 이어 즉위한 문주왕은 즉시 천도를 결심하는데 그 곳이 바로 충남 공주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문주왕이 개로왕의 자식이 아니라 공주를 기반으로 한 토호세력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 연지부근에 비밀통로로 상요됐던 '암문' 성곽밑으로 한명이 지날수 있는 크기의 문으로 평소에는 막아뒀다가 필요시에만 사용한다.

역사의 흔적, 공산성

공산성에 도착하면 누구든 언덕위로 펼쳐진 장엄한 성벽과 커다란 성문을 올려다보게 된다.

이곳이 공산성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금서루다.

지금의 금서루는 1993년에 복원한 것인데, 복원 당시 조선 후기에 발간된 공산지 기록과 지형적 여건을 고려했다고 한다.

금서루로 올라가는 성벽 밑에는 가을을 알리는 코스모스 한무리가 바람에 하늘거린다.

공산성은 전체를 둘레길처럼 조성해 역사 유적이자 산책로, 공원으로 꾸며졌다. 금서루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니 금강이 가로지르는 공주시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문을 갖추고 있는데, 금서루는 서문에 해당된다. 잘 닦인 성곽길을 따라가면 남문인 진남루를 만나게 된다. 진남루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길이 모여 한양으로 갈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진남루 위쪽으로는 석축이 없는데, 공산성은 처음 축조될 때는 토성이었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석성으로 개축됐기 때문이다.

   
▲ 임류각
◆알면 더욱 재미있는 공산성

용이 펄럭이는 깃발을 따라 다시 올라가니 남문인 영동루가 나타난다. 이곳은 그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1980년 발굴 조사 때 하부구조가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드러나 금서루와 함께 복원됐다. 그렇게 산 속으로 난 성곽을 한참 걸다보니 시야가 확 넓어지며 금강과 공주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강변의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내려오면 강가에 북문인 공북루가 기다리고 있다.

공북루는 망북루로도 불렸는데, 여기서 망북은 ‘북쪽을 바라본다’, 즉 임금이 있는 곳을 기린다는 의미다.

이렇게 공산성의 주요 4대문을 지나 조금 더 가면 만하루와 커다란 연못 ‘연지’가 나타난다.

연지의 벽면은 돌로 경사지게 쌓아올린 것이 특징인데, 밑면의 지름이 7m, 윗면은 21m나 되는 큰 규모다.

이 연못 바닥에서는 가장 아래에 백제 유물이, 그 위로는 신라 유물이 출토돼 역사의 흐름을 그대로 나타냈다.

연지 부근에는 특이한 문이 하나 있는데, 비밀통로로 사용됐던 ‘암문’이다.

성곽 밑으로 사람 한 명이 지날 수 있는 크기의 암문은 평소에는 돌로 막아뒀다가 필요시에만 사용했다고 한다.

 

   
▲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교

공산성의 역사적 사실은

역사 학자들은 공산성이 웅진 백제 시절 왕성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과 공산성에서 출토된 유물 중 ‘궁(宮)’ 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있다.

그런데 공산성을 둘러보면 이곳을 왕궁으로 사용하기엔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일단 생활면에서는 산에 위치한 까닭에 성 내부의 실제 활용 공간이 좁고, 이동도 불편했을 것이다.

또 군사적 측면에서는 성곽이 홀겹인데다 지형적인 요소 외에는 방어에 의존할 만한 것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성이 어떻게 왕성의 역할을 했을까?

학자들은 그 자체가 당시 백제가 처한 상황이 그만큼 긴박했다는 반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 당시 백제의 상황이 그만큼 긴반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고구려에 밀려 남쪽으로 피난을 오면서도 새로운 부흥을 노리던 백제.

공주는 그런 백제에게 한 숨을 고를 수 있는 장소였다. 그리고 백제 왕실이 잠시 머물다 갔지만, 이후에도 문화·전략의 요충지로서 백제문화의 꽃을 피우는 도시 역할을 했다. 산뜻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공산성 둘레를 한바퀴 걷는 동안 어느세 백제의 옛 흔적에서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백제문화제가 진행되는 동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옛 백제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볼 수 있길 희망한다.

글·사진 = 이재형 기자 1800916@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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