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부여에선 현재 백제역사재현단지 건립 공사가 마무리 단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1700여년 전 근초고왕이 가졌던 원대한 꿈의 크기가 반영돼 있다. (사진은 백제역사재현단지 내 왕궁사찰 모습)  
 
4세기, 즉 서기 300년대는 동아시아(한국·중국·일본)의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근초고왕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한반도 중원에서 태동하면서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질서에 변화가 생겼다.

당시 중국 대륙은 남북조로 분열되는 혼란기로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중국 대륙, 북방 유목민과 국경을 접하면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던 고구려 입장에선 한 숨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볼 수 있다.

대륙의 분열로 한반도 북쪽의 긴장관계가 완화된 상황에서 고구려는 자연스럽게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준비절차에 착수하게 된다.

바로 언제라도 고구려의 뒤를 노릴 수 있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세력권에 포함시키는 일이었다.

◆완충지역이 사라지다

4세기 초, 한반도엔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가 저마다의 세력권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 고구려와 백제 사이엔 낙랑군과 대방군이라는 중국 본토의 직접지배를 받는 세력이 꾸준히 존재해 왔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끼여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중국 본토의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하나의 거점 역할을 했다.

그런데 4세기 초, 대륙의 분열로 낙랑군과 대방군의 입지가 약화되면서 고구려의 표적이 돼 버렸다.

고구려 입장에선 어차피 대륙과의 관계가 끊어질 운명이라면 백제의 세력권에 편입되기 전에 먼저 도모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당시 고구려 미천왕은 311년 서안평을 점령해 낙랑군과 대방군의 보급로를 차단한 뒤 곧바로 북쪽 전선을 뒤로 하고 남하해 서기 313년과 314년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차례로 접수했다.

긴장관계의 완충지역이 사라지고 고구려와 백제가 처음으로 세력권을 맞대는 순간이었다.

◆운명적 맞수의 조우

한강유역을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해 온 백제는 3세기 후반, 마한연맹체를 주도했던 목지국(천안 추정)을 세력권에 넣었고 근초고왕 즉위 이후 지속적으로 세력권을 넓혀 지금의 전라도 일대에 남아있던 마한의 잔존 세력과 경상도 남부 일대 가야세력을 차례로 세력권에 포함시켰다.

힘의 우열관계 속에서 무력으로 점령했다기 보다 서로 인정하는 선에서 동맹관계를 맺게 됐다고 볼 수도 있다.

백제의 영토와 영산산 유역 등지에서 발견되는 금동관모는 이 시기 백제가 복속한 영역의 수장에게 하사해 간접적으로 그 지역을 세력권에 넣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중국의 선진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여 새롭게 백제의 것으로 승화시켜 온 백제는 배후에서의 도발 걱정 없이 북쪽만을 염두에 둘 수 있었다.

근초고왕의 세력 확장은 즉위 3년부터 20년 사이에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엔 근초고왕 관련 기사가 즉위 2년에서 바로 21년으로 건너뛰기 때문에 일본 서기에 나타난 기사를 통해 유추 해석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일본 서기엔 백제의 요청으로 일본이 군대를 파견해 가야세력과 마한 잔존세력을 점령한 뒤 백제에 줬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정황상 믿긴 어렵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긴장관계의 정적을 깬 것은 고구려였다.

숙적이었던 전연(前燕)이 전진(前秦)에 의해 망하는 흐름이 감지되자 고구려는 옛 낙랑·대방군지역까지 내려와 치양성(황해도 배천 추정)을 공략했다.

369년, 백제와 고구려가 국가의 존망을 건 운명적 한 판 승부를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백제…한반도의 패권을 쥐다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남하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태자(훗날 근구수왕)를 보내 응수했다.

첫 대면에선 백제가 승리해 예성강 상류 수곡성(황해도 신계 추정)까지 고구려를 쫓아 올라가 세력권을 넓혔다.

기세가 오른 근초고왕은 2년 뒤 태자와 3만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 남진의 전진기지였던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은 날아온 화살 맞아 전사하고 만다.

한반도의 패권을 백제가 틀어쥐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백제의 세력권은 북으로는 대체로 배천~신계를 잇는 예성강유역, 남으로는 전남 해안에 이르는 한반도 서부지역을 확보하고 소백산맥 넘어 낙동강유역의 가야에도 세력을 뻗치게 됐다.

백제는 이 무렵이 정복국가로서의 절정기였다고 볼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큰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새로운 영역을 확보하면 이를 기념해 열병식을 거행하기도 했는데 왕이 군통수권을 확인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근초고왕은 고구려와의 첫 대면이었던 치양성전투에서 승리한 뒤 열병식을 거행했다.

삼국사기는 당시 상황을 ‘근초고왕 24년 11월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대열했는데 깃발은 모두 황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대륙의 황제, 즉 최고 권위를 상징했던 황색을 사용했다는 얘기다.

이것은 백제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뒤 한반도를 호령한 명실상부한 황제의 나라가 됐음을 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같은 해석이 지나칠 수도 있지만 건국 이래 최대의 세력권을 확보한 백제의 입장을 미뤄 짐작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삼국사기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수도를 한산으로 옮겼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한성백제의 왕성이 묘연한 상황에서 이 기사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백제-왜 선진문물 교역동맹

4세기 중반, 고구려와 백제의 패권다툼에서 왜(일본)는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당시 국가의 세력권은 곧 중국 대륙의 선진문물을 받느냐 못 받느냐와 비례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경우 대방군과의 우호관계 속에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가 대체로 쉬웠던 반면 일본은 지형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전제가 인정된다면 일본은 마찰을 빚어온 고구려-신라 보다는 백제에 의존하는 것이 필연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중국 선진문물 교역의 한반도내 거점은 백제에 편중될 수밖에 없었고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일본은 백제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지 않았을까.

더욱이 가야세력까지 백제권에 편입된 마당에 일본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칠지도의 비밀

백제의 절정기를 이룩한 근초고왕대는 영토의 확장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면에서도 주목할 일들이 일어났다.

왜(일본)와 교역의 물꼬를 트는 한편 중국 남경에 자리잡은 동진에 사신을 파견(372)해 백제로서는 중국과의 직접적인 국교에 첫 기록을 남겼다.

이전까진 중국 대륙과의 교류에서 백제는 마한의 한 소국가로 인식됐지만 근초고왕은 당당히 마한을 주도하는 백제라는 국호로 교류하기 시작했다.

또 이제까지 문자기사(文字記事)가 없던 백제가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서기(書記)를 편찬한 일도 근초고왕 때의 일이었다.

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은 바로 일본에서 발견된 칠지도(七支刀)다.

칠지도는 일본서기 신공황후 52년 9월 기사에 그 이름이 보이고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석상신궁)에 실물이 전해진다.

그런데 이 칠지도 앞뒤에 새겨진 명문을 놓고 이견이 분분하다.

대체로 근초고왕대에 이뤄진 일로 보이는 데 일본은 백제가 일본에 헌상(獻上)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우리는 하사(下賜)한 것으로 본다.

글=이기준 기자 poison93@cctoday.co.kr

사진=김상용 기자 ksy21@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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